(시론)손글씨와 필사에 관한 단상
입력 : 2022-06-23 06:00:00 수정 : 2022-06-23 06:00:00
이번 학기에도 어김없이 학생들에게 손글씨 과제를 내주었다. 대학에서 외국어 강의를 한 지 삼십 년도 넘었지만, 한결같이 손글씨 과제를 부여했다. 과제는 본문에 나오는 문장을 노트에다 ‘세 번 이상씩’ 쓰는 것. 물론, 왜 세 번 이상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첫 번째 쓸 때는 본문을 ‘소리 내서 읽으면서’ 쓰고, 두 번째 쓸 때는 ‘읽으면서 외우면서’ 쓰고, 세 번째 쓸 때는 ‘외우면서’ 쓰라고 주문했다. 세 번을 써도 효과가 없을 때는 세 번 이상, 그 문장이 자기 것으로 스며들 때까지 쓰라고 하면서. 제대로만 하면 공부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렇게 부과한 쓰기 과제는 대부분의 학생이 제출했다. 물론, 학점에 반영되니까 억지로 쓴 느낌을 주는 노트도 있었지만, 많은 학생은 교수의 주문과 의지대로 잘 따라주었다. 효과가 있었다. 이런 교수법은 당분간 버릴 생각이 없다. 
  
혹자는 지금과 같은 디지털 세상에 왜, 손글씨 과제를 강요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글씨는 뇌를 활성화 시킨다”, “손으로 펜을 움직이는 운동 제어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뇌의 인지 발달을 돕는다”, “손은 제2의 뇌다”와 같은 다수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면, 손글씨는 우리의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공부 방법의 하나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에게나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렇게 점차 일상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손글씨와 함께, 이제는 낯선 용어가 되어 버린 듯한 것이 필사(筆寫)다. 필사는 말 그대로 베껴 쓰는 행위. 고전이든 현대물이든 명작을 하나하나 베껴 쓰는 연습인데, 뛰어난 문학작품을 비롯한 모든 장르의 예술작품, 신문 기사, 명칼럼, 논문 등,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모든 일에 ‘빨리빨리’를 요구하는 세상에 길들어져 가고 있다. ‘느림’은 퇴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정착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필사는 반드시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느림은 집중력의 근육을 키우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행간에 존재하는 뜻을 생각하면서 손으로 천천히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에 쓰인 글자와 문장을 하나하나씩 필사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과정에서, 그 글자와 문장에 담긴 작가의 뜻과 상상력을 만나는 짜릿한 경험, 그것이 나의 것으로 내 몸속으로 정착해가는 느낌을 받는다면 필사는 작가와의 아름다운 동행이 된다. 나는 그것을 ‘체화(體化)’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어서 자기 것이 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남에게 고용되어 필사를 하고 사례를 받는 사람들, 즉 ‘용서(傭書)’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후한 때의 ‘반초(班超)’나 ‘왕부(王符)’는 필사의 과정을 거쳐 학자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필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로 들 만하다. 물론, 지금의 유명 작가들에게도 필사는 글쓰기 수행 방식의 하나로 회자된다.    
 
나 역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글이 잘 풀리지 않으면 좋은 글을 따라 써 본다. 때로는 낭송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금까지 읽었던 감상에 더하여 또 다른 상상이 펼쳐지는 행운이 찾아온다. 새로운 상상과 신비의 느낌을 그 작품 옆에 써두는 호사를 누린다. 나에게 생산을 일으킨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필사가 과연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하며, 의아하게 혹은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방법 하나를 권해 드린다. 굳이 그 텍스트를, 그 콘텐츠를 다 베끼려고 하지 말자. 그럴 필요 없다. 자기가 감동을 느끼고, 자극을 받았던 부분만 베껴 써 보면 된다. 
 
눈으로 하는 독서에 손과 머리로 하는 독서, 즉, 필사를 병행해보자. 느림의 미학이 속독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접근했다면, 당신의 글쓰기와 당신의 생각에도 꽃이 피고 있다는 방증이다. 평소 글쓰기에 자신 없는 사람이나 책을 읽었더라도 무엇을 읽었는지 정리가 안 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손글씨든 필사든 손으로 쓰는 행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손은 제2의 뇌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문득, 어느 작가가 대학 시절, 평소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던 여인에게 노트 필기한 것을 보여 주었더니,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손글씨가 그 사람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다는 함의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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