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망치 든 예지…서태지-이정현 음악 떠올려
세계로 가는 초국적 음악…한국 세대 간극·팬데믹 인종차별서 영감
세기 말 한국 록, 일렉트로니카 융합…올해 미국 '코첼라' 무대
“한국어는 시적인 표현 가능…세대 간 트라우마 끊어야”
입력 : 2023-04-10 17:53:18 수정 : 2023-04-10 17:53:18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할아버지는 항상 내게/ 빨리 먹으라고 하셨지/ 이제 나도 지지한테 그 말을 하게 될진 몰랐지... 눈이 번쩍 삐까삐까'(곡 'Done (Let's Get It)' 중)
 
구순을 앞둔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망치를 내려치면, 외계어 같은 한국어와 함께 펼쳐지는 판타지 세계. 90년대 후반 유행하던 몽글몽글한 필터의 영상 미학과 귀여운 토끼 모양 잠옷을 두른 'K-조손 지간', 시뻘건 고추와 한국의 아파트, 놀이터….
 
한국계 미국 음악가이자, 세계에 닿고 있는 DJ 예지(YEJI·이예지·29)가 돌아왔습니다. 지난 7일 전 세계 동시 발표한 첫 정규 앨범 'With A Hammer'는 '해머 리(Hammer Lee)'라는 망치 캐릭터를 내세워 음악이 사회 현상을 거울처럼 비출 수 있음을, 또 '코스모폴리탄'처럼 나아가며 문화 현상들을 굴비처럼 엮고, 통찰의 카타르시스에 이르도록 돕는 작품입니다.
 
한국계 미국 음악가이자, 세계에 닿고 있는 DJ 예지(YEJI·이예지·29). 사진=강앤뮤직·XL레코딩스
 
최근 서면으로 본보 기자와 만난 예지는 "팬데믹 기간 동안 뉴욕에서 지내면서 흑인들이 여전히 살해당하고 억압받는 현실,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이유로 아시아인들이 표적이 되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고, 그에 대한 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무슬림과 흑인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며 억압하는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한 미국,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의 가혹한 현실에도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이 앨범을 완성했을 때는 온전히 사랑이라는 감정만 남았어요."
 
총 13곡이 수록된 첫 공식 음반에는 망치 캐릭터를 입혔습니다. 거창한 철학 서적까지 거론하지 않아도, 직관적이고 통찰적이며, 범세계적인 이야기 구조는 오늘날 우리 일면을 들여다보는 우물처럼 작용합니다. 망치는 한국의 스트레스 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감시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방과 대여 시간, 물건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부수는 흥미롭고 신선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어요. 한국인으로 느끼는 깊은 억압과 분노를 남성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곳이기도 했죠. 무거운 망치를 들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면 제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을지, 분노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망치는 저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을 가르쳐준 존재가 됐어요."
 
한국계 미국 음악가이자, 세계에 닿고 있는 DJ 예지(YEJI·이예지·29) 첫 정규 음반 'With A Hammer'. 사진=강앤뮤직·XL레코딩스
 
음반은 '사회적으로 강요한 억압과 싸우고 그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야기'라는 큰 줄기 아래 흘러갑니다. 수록곡 'Done (Let's Get It)'은 세대 간 사고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자는 메시지. "한국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매 끼니마다 '빨리 빨리 먹어라'라고 혼내셨던 기억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물론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려셨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많았고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최근 저도 반려견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제가 반복하고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우리가 무의식중에 대물림하는 악순환, 세대 간의 트라우마, 고통이 있어요. 이를 인식하는 게 먼저고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마음과 그를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를 시도해 봐야겠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이번 생에서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분노와 갈등에서 시작한 음반은 결국 자유와 희망을 꿈꾸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망치의 전소(全燒) 뒤 거울 속 자신을 보듯. 통통 튀는 일렉트로닉 비트와 캐치한 멜로디로 시작해 서서히 어둠으로 전환하는 ‘For Granted’를 지나면 총 13곡의 '삐까삐까' 한 판타지 세계가 펼쳐집니다. 기존에 펼쳐보인 몽롱한 전자음악 뿐 아니라,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인디록, 팝의 융합까지 사운드 스케이프를 확장시킨 것과 관련, 예지는 "(음반 제작 당시) 서태지님과 이정현님의 음악을 많이 떠올렸다. 요즘은 힙합, 보사노바, 인디 일렉트로니카, 인디 록,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계 미국 음악가이자, 세계에 닿고 있는 DJ 예지(YEJI·이예지·29). 사진=강앤뮤직·XL레코딩스
 
1993년 뉴욕 출신인 예지는 미국을 포함 전 세계를 무대로 DJ,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딥하우스 장르에 독특한 한국어 가사를 섞어 해외 언론에서 먼저 유명해졌습니다. 동그란 테안경을 쓰고 '그게 아니야' 같은 한국어를 오토튠에 버무리는 전자음악은 그의 상징입니다.
 
2019년 본보 기자와의 인터뷰 당시 "한국어는 각이 져 있고 질감이 있는 느낌"이라며 "발음에 시적인 아름다움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감을 (음악에) 잘 활용하려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음반의 한국어 활용에 대해서도 "영어는 문자 그대로 전달하기 쉬운 반면, 한국어는 좀 더 추상적이고 시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원초적인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한국어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사에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특별히 계획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혀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쉽게 나오는 것 같아요.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카네기 멜론대의 개념미술 전공자며 취미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독특한 이력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영상과 무대 아트를 직접 편집하며 음악의 시각화(비주얼라이제이션)를 주도합니다. "(이번 앨범에선)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법 소녀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처럼요. 판타지는 우리가 배우고, 꿈꾸고,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도구이며 때로는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며 한국어 등 문화 코드를 내적으로 체화한 음악이 다시 서울, 런던과 뉴욕으로 뻗어갈지 주목됩니다. 오는 4월 15일과 22일, 미국에서 열리는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 무대를 시작으로 월드투어도 돕니다. 무국적 언어, 초국적 음악은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제 보컬은 프로덕션 상 라이브로 공연할 때 제일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연 전체가 하나의 스토리로 흘러가도록, 대형 LED 스크린으로 세트가 전체가 진행되는 동안 비디오 콘텐츠를 보여줄 예정이에요. 조명도 제 친구들이 직접 제작하여 설치해서 제가 디제잉을 할 때는 무대가 클럽처럼 보이면서 그 기분을 만끽 하실 수 있을 거에요. 올해는 행복하고 싶어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계 미국 음악가이자, 세계에 닿고 있는 DJ 예지(YEJI·이예지·29). 사진=강앤뮤직·XL레코딩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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