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입력 : 2023-05-10 06:00:00 수정 : 2023-05-12 14:10:02
“당신은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그럼에도?
“네.”
“뭘 원했나요?”
“이 세상에서 사랑받았다고 말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거요.”
 
레이먼드 카버의 묘비에 새겨진 <짧은 단상 Late Fragment>이라는 시이다. 암투병 중에 쓴 마지막 시집(「A New Path To The Waterfall」)의 마지막 시이기도 하다. 이 시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걸. 그러니까 이 마음은 어른이 되고 지혜가 쌓인다고 해서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교묘히 숨기고 아닌 척 위선을 떨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훈련받는다.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익히고 상황과 위치에 맞게 가면을 쓰는 처세술을 키워나간다.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인 리건은 한물간 배우다. 재기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연극 한 편을 올렸지만 본 공연에 앞서 열린 프리뷰 무대마다 연달아 사고가 터진다. 그는 흥행에 실패하면 빈털터리가 된다는 사실보다 다시는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까봐 불안해한다.  
“아빠는 대체 누구죠? 블로그, 트위터를 싫어하고 페이스북도 안 하잖아요. 아빠는 존재가 없다구요! 이 연극을 하는 건 밑바닥 인생이 될까 두려워서죠. 그거 알아요? 아빤 잊혀진 존재예요.”  
리건을 향해 독설을 날리던 딸 샘은 리건이 속옷바람으로 거리를 횡단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자 ‘이런 관심도 힘’이라고 말한다. 잊히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게 낫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딸이 그렇다하니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늘 ‘버드맨’이 있다.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속 캐릭터 ‘버드맨’이 “너는 최고야!”라고 쉴 새 없이 속삭여준다. 무의식의 산물이지만 그 말들로 그는 겨우 버티고 산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그의 간절함은 끝내 극단의 시도를 하게 만든다. 준비도 안 된 주제에 작가며 감독이며 배우인 척 꼴값 떨지 말라던 유명한 연극비평가가 그의 충격적인 시도를 보고 “‘초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개척했다”며 입장을 번복한 걸 보면 그 시도는 먹힌 것 같다. 연극은 성공했고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 결과가 그가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사랑받고 싶음’의 궁극일까.
 
자기어필이 능력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강요받는다. 어릴 때부터 SNS에 노출되며 ‘편집된 삶’과 ‘멀티 페르소나’에 익숙해진 영맨들은 소위 관종력 경쟁을 벌이기 일쑤이고, 라떼를 잊지 못하는 올드맨들은 지나간 영광을 부활시키려 들거나 잘 살아왔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대로 SNS의 허세에도 인플레이션이 있을 수밖에. 리건의 갈구가 예술의 지향이 아닌 대중의 관심과 인정이라는 걸 알아차린 비평가가 “당신은 배우가 아니라 연예인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 것처럼 SNS 속 수많은 페르소나들은 또 다른 리건들이다.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내 자아가 태어나 형태를 갖추는 곳, 가정. 페르소나들이 넘쳐나는 현실의 문제는 대부분 가정에서 기인한다. 받아야 할 사랑, 주어야 할 사랑이 제대로 오고가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5월만이라도 무대에서 내려와 가면을 벗어보는 건 어떨까. 관객은 화려한 가짜 얼굴에 환호를 보내다 공연이 끝나면 자리를 뜰뿐이다. 진짜 사랑을 줄 사람, 진짜 사랑을 주어야 할 사람 앞에 맨 얼굴로 다가가 보자. 사랑을 확인할 순간은 바로 그 순간이다.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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