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 살해 혐의로 23년째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씨의 재심 재판이 24일 1년 만에 재개됩니다. 복역 중인 무기수에 대한 재심은 처음입니다. 23년 전 그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김씨의 재심 재개일인 오늘, 사건의 전말을 짚어봤습니다.
새벽녘의 변사체
2000년 3월 7일 새벽 5시 50분쯤, 전남 완도군 정도리의 한 버스 정류장 앞 도로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사망자는 52세 김모씨. 경찰은 사건 현장에 승용차의 깨진 라이트 조각 등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뤄 보아 일단 뺑소니 교통사고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습니다. 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던 3급 지체장애인. 거주지는 사건 현장에서 7km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렇다 할 외상도 없는 상황. 유족들은 김씨를 부검하기로 결정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김씨는 사망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0.303%였고 수면유도제 독실아민 성분도 13.02㎍/㎖ 검출됐습니다. 경찰은 즉시 살인사건으로 전환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성추행 당한 딸의 보복
사건 이틀 뒤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됩니다. 범인은 작가 지망생인 김씨의 큰딸 신혜씨. 경찰은 김씨가 과거 자신과 이복 여동생을 성추행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결론냈습니다. 수면유도제 30알을 갈아 양주에 타 먹인 뒤 살해한 뒤 자신의 차에 태워 사건 교통사고로 위장해 도로에 아버지 시신을 버렸다는 겁니다. 아버지 명의로 가입한 생명보험 8건과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면유도제, 범행 계획 기록 등이 유력한 물적 증거였습니다. 신혜씨도 자수와 함께 범행을 자백했고,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복 여동생도 피해 사실을 진술했습니다.
진술 번복한 살인범
그런데, 현장검증을 앞두고 신혜씨가 돌연 자백을 모두 번복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신혜씨를 검찰로 넘겼고, 검찰은 2000년 4월 1일 신혜씨를 존속살해죄로 구속기소했습니다. 2008년 8월 1심 법원은 신혜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합니다. 알리바이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신혜씨가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으나 결과는 같았습니다. 결국 신혜씨는 2001년 3월 23일 무기징역형이 확정됐습니다. 사건은 그렇게 끝나는 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1년 뒤쯤 언론을 통해 신혜씨가 결백하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무리하고 강압적인 경찰 수사로 증거와 진술이 꾸며졌고, 이를 검찰이 그대로 받아 기소했으며, 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은 이 사건은 그렇게 다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신혜씨의 알리바이
신혜씨와 가족의 주장을 종합하면 사건 전날 신혜씨는 차를 렌트해 고향 완도로 내려갑니다. 할머니 댁에 내려가 있는 남동생을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향에 있는 친구 2명와도 자신이 지금 완도로 가고 있으니 시내 구두 가게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내려가는 도중 대전의 한 휴게소에 들러 완도에 계신 아버지에게도 전화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각 주민 2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23년을 옭아 맨 4시간
사건 당일 오전 0시 55분쯤 고향 마을 입구에 도착한 신혜씨는 공중전화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해 약속시간을 다시 잡아야 했기 때문이었죠. 이어 집에 전화하자 여동생이 '아버지가 술에 많이 취해 할아버지, 할머니와 싸웠다'고 했습니다. 순간 신혜씨는 집에 들어가려던 생각이 싹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술에만 취하면 난폭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이 어디냐고 묻자 신혜씨는 '마을 검문소'라고 엉겁결에 말해버립니다. 전화를 끊고 또다른 친구에게 전화해 잠자리를 청했지만 '부모님에게 혼날 것 같아 안 된다'며 거절 당합니다. 신혜씨는 결국 차 안에서 4시간 정도 술을 마시며 소설을 구상하다가 날이 밝자 집으로 갔습니다. 이 4시간이 신혜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습니다.
"알리바이는 조작된 것"
신혜씨의 알리바이는 그녀와 통화한 모든 사람들이 법정에서 증명해줬습니다. 아버지와의 통화 내용을 들은 주민들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이 모든 것이 신혜씨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한 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신혜씨도 차 안에 혼자 있었다는 4시간에 대한 객관적 입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으며, 위법하고 강압적으로 신혜씨의 진술을 받아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겁니다.
신빙성 흔들리는 물증들
8개의 생명보험 : 사건 발생 전 이미 3개가 해약됨. 나머지도 2년 후에나 지급 대상.
독살아민 : 치사량에 한참 못미침. 성분 특성상 액체와 혼합되면 떡처럼 뭉쳐져 삼키기 어려움. 사망자에게 먹였다는 다른 증거 없음.
살인계획서 : 경찰이 영장 없이 압수. 이후 조서 위조. 피고인은 자신의 시나리오 습작이라고 주장.
강압수사 : 피고인은 진술 번복 뒤 경찰이 폭행했고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억지로 조서에 날인시켰다고 주장.
의문의 참고인
신혜씨가 존속살해범으로 인정된 가장 큰 단초는 본인의 자수와 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신혜씨의 고모부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신혜씨를 만난 고모부는 '간밤에 남동생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뒤처리를 도왔으니 집안 전체를 생각해 네가 했다고 해라'라고 신혜씨에게 말 합니다. 신혜씨는 남동생과 이야기 하겠다고 했지만 고모부가 이를 말립니다. 이후 신혜씨더러 경찰에 자수하라고 하고는 본인이 경찰에 신고합니다. 고모부는 신혜씨가 경찰에 체포된 뒤 참고인 조사에서 '신혜가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알고 분개했었다'고 진술합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인 거니?"
당시 진상조사에 나섰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서에 온 남동생은 신혜씨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인 거니? 사실이니?" 고모부 말만 믿은 신혜씨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동생은 경악합니다. 자신은 누나가 아버지를 죽이고 잡혀 온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 역시 고모부였습니다. 남동생을 만난 뒤 신혜씨는 결백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14년만의 재심 청구
2015년 1월 대한변호사협회가 신혜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합니다. 무기징역 확정 14년만이었습니다. 그동안 신혜씨는 감옥 안에서 끊임 없이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니 할 이유가 없다며 노역도 거부했습니다. 가족은 가족대로 신혜씨 구명에 나섰습니다. 결국, 광주지법 해남지원은 경찰의 위법수사가 인정된다며 같은 해 11월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검찰이 항고했으나 기각됐고 대법원도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했습니다. 신혜씨의 재심은 이렇게 2019년 3월 시작됐다가 변호인 교체와 국선변호인 선임 취소 등으로 연기됐고, 24일 오전 10시 광주지법 해남지원 제1호 법정에서 형사1부(재판장 박현수 지원장) 심리로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립니다. 사건 발생 23년만입니다. 쟁점은 신혜씨가 △번복한 진술의 신빙성과 △경찰의 위법수사 △증거물과 증인들 진술의 신빙성 등입니다. 이 쉽지 않은 싸움에서 신혜씨와 검찰은 맹렬하게 다툴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사건 발생 당시 스물 세살이었던 신혜씨는 어느덧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법은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해야 하지만 그 전에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게 먼저입니다. 신혜씨 주장대로 무고함이 인정된다면, 그 다음은 반드시 진범을 밝혀야 합니다. 공소시효 등 문제가 있지만, 덮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경찰과 검찰, 법원도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대해 사과해야 합니다. 국가도 배상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그게 법치이자 정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