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울디시안, 천부의 권리를 외치다
(이범종의 게임 읽기)디아블로②죄악의 전쟁(상)
악마와 천사, 종교 만들어 인간에 대한 영향력 다툼
"우린 우리 스스로의 주인" 천부의 권리 선언한 혁명
빼앗긴 주권 되찾으려 천사도 악마도 거부
과대망상 천사 아버지와 악마 어머니의 좌절
입력 : 2023-06-02 06:00:16 수정 : 2023-06-02 06:00:16
무수한 생명이 하나의 세계를 살다 갑니다. 뱀은 온도의 세계를, 박쥐는 초음파의 세상을 삽니다. 반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사는 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펜을, 때로는 마우스를 들고 빅뱅에 버금가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 세상을 창조해냅니다. 그렇게 연극 무대가 세워지고 영화가 개봉됩니다. 거울과도 같은 세상으로 초대된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웃고 웁니다. 응시하는 관객,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을 아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게임입니다. 주체가 된 관객을 우리는 게이머라 부릅니다. 주말 아침 플레이스테이션을 켜는 아버지, 숙제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은 딸은 어느 세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걸까요. 새롭게 준비한 코너 '이범종의 게임 읽기'는 게임 속 세상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이 이야기들의 만듦새와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순서로 실시간 액션 롤 플레잉 게임의 기준을 세운 '디아블로'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게임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디아블로를 배경으로 만든 소설들을 참고해 기술합니다. (편집자주)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지난 1편에서 디아블로 세계의 시작을 소개해드렸는데요. 끝없는 전쟁에 지친 천사 이나리우스와 악마 릴리트가 세계석이라는 보석의 힘으로 '성역'이라는 낙원을 만들었고, 이들의 혼혈종이자 인류의 조상인 '네팔렘'이 태어났었죠. 불타는 지옥은 인간의 잠재력을 알고 '삼위일체단'이라는 종교를 만들어 세력을 확보하려 합니다. 이를 간파한 천사 이나리우스는 '빛의 대성당'을 만들어 세력 다툼을 이어갑니다. 두 종교의 교세는 막강해졌지만, 실제 민중의 구원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성역의 존재를 알게 된 천상이 군대를 보내 인간을 없애려 하지만, 한 농부의 희생을 본 대천사 티리엘이 마음을 돌려 인류를 살리기로 합니다. 인류 멸망을 막을 만큼 숭고한 희생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걸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려드릴까 합니다.
 
포장된 길이 없어 장화가 필수인 시골 마을 세람. 근근이 살아가는 200명 가운데 우직한 농부 한 명이 주점에 들러 하루의 노동을 위로합니다. 하지만 맥주 한잔으로 얻은 평화는 누군가의 접근으로 산산이 조각납니다.
 
"빛을 본 적이 있습니까, 형제여?"
 
울디시안은 빛의 대성당 선교사의 멱살을 붙잡습니다. 그는 전염병이 돌았을 때 부모님과 형, 두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이 순박한 농부는 가족 곁에서 내내 기도했습니다. 처음엔 가족을 살려달라 했는데, 가망이 없자 빠르고 고통없이 죽게 해 달라고 빌었죠. 선교사들에게 가족을 구원해달라고 애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알 수 없는 말들과 헌금 요구뿐이었습니다.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울디시안은 삼위일체단과 빛의 대성당을 혐오했습니다.
 
성역의 한 마을 원화. (사진=블리자드)
 
그러던 어느 날 '릴리아'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숲에서 그녀와 함께 삼위일체단 성직자 시신을 발견한 울디시안은 신고하러 마을에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번엔 자신이 멱살을 잡았던 빛의 대성당 선교사의 시신에서 그의 검이 발견됩니다. 살인 누명으로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빛의 대성당 주심문관에게 벼락을 내리고 마을에 폭풍도 일으킵니다. 이 길로 울디시안은 친구 아킬리오스와 세렌시아, 동생 멘델른, 릴리아와 마을을 떠납니다. 심상치 않은 힘을 감지한 삼위일체단은 울디시안 추격에 나섭니다.
 
울디시안, 사랑의 힘으로 네팔렘 힘 일깨워
 
릴리아는 끝없이 울디시안의 각성을 유도합니다. 울디시안이 손 대자 접질린 릴리아의 발목이 나았고, 말라비틀어진 덤불에선 싱싱한 딸기와 예닐곱 종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릴리아는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 하지 않는 강한 존재로 거듭나도록 설교하라고 설득합니다.
 
"마법단, 삼위일체단, 대성당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울디시안!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떤 예언자나 성직자도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죄악의 전쟁 1권: 천부의 권리)
 
울디시안은 처음 도착한 도시 파르타에서 사람들의 장애와 흉터를 없애줍니다. 그들이 이웃과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단의 공격을 받은 뒤, 동료와 마을의 안전을 위해 몰래 도시를 떠납니다.
 
울디시안을 뒤따라온 릴리아는 마지막으로 안고 키스해도 자신을 떠날 수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그녀를 안으려던 울디시안은 릴리아의 본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전 남편 이나리우스와 오빠 루시온으로부터 인류의 힘을 빼앗으려는 증오의 딸, 릴리트였습니다. 릴리트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라, 루시온이 극적인 순간에 맞춰 동생의 껍질을 몰래 벗겨낸 겁니다. 악마 남매인데 사이 좋을 리 없겠죠.
 
앞서 세람에서 삼위일체단과 빛의 대성당 선교사를 죽여 울디시안을 위기에 빠뜨린 건 릴리트였습니다. 벼락으로 주심문관을 태우고 마을에 폭풍을 일으킨 것도 그녀였지요. 릴리트는 이 세상이 천사와 악마가 만든 성역이란 곳이며, 인간은 그들의 피 섞인 자식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네팔렘의 힘을 각성하게 한 목적과 엇나간 모성애를 드러냅니다. '아이들'의 힘으로 천상과 지옥을 정복해 영원한 분쟁을 끝내고, 자신이 세상 전부를 차지하려는 속셈을요.
 
"다시 한 번 네팔렘들이 일어서게 되고, 이번에는 그들의 정당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하하! 나 역시 나의 정당한 자리를 찾을 거야. 드높은 천상과 불타는 지옥이 얼마나 소리를 질러대든 상관없어! ··· (중략) ··· 아이들은 특별했어. 아이들은 악마들이나 천사들 이상이었어! 그때 나는 그 아이들이 미래라는 것을, 그 지긋지긋한 싸움의 진정한 종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죄악의 전쟁 1권: 천부의 권리)
 
’죄악의 전쟁‘ 1권 전자책 표지 일부. 리처드 A. 나크 지음, 이원열 옮김. 제우미디어
 
아픔 딛고 일어나 '천부의 권리' 외치다
 
릴리트는 울디시안의 능력이 자기가 만든 가짜였다고 조롱하고 떠났지만, 울디시안은 자신을 납치하려 접근한 루시온을 쓰러뜨리며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구하려던 친구 아킬리오스와 파르타 주민들이 희생당하자 슬픔과 분노가 힘을 북돋웠습니다. 루시온은 죽기 전에 여동생이 유일하게 사랑한 이는 울디시안이 아닌 이나리우스 뿐이었다고 도발합니다. 친구와 마을 사람들의 장례를 치른 울디시안은 권력을 위해 민중의 운명을 갖고 노는 삼위일체단과 빛의 대성당을 박살 내, 이들에게 빼앗긴 천부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합니다(케지스탄력 기원전 1809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다스려야 해요! 그것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힘만큼이나 우리의 천부의 권리입니다! 우리의 천부의 권리!"(죄악의 전쟁 1권: 천부의 권리)
 
그렇다면 릴리트의 전 남편, 인류의 아버지에겐 부성애가 있을까요? 릴리트의 귀환을 감지한 이나리우스가 옛 사랑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자식에 대한 그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역과 그 안의 모든 것은 내가, 내 손으로 부술지언정 너의 것이 되지는 않을 거야···. 그게 나의 권리야···.'(죄악의 전쟁 1권: 천부의 권리)
 
수백년 만에 빛의 대성당 위로 날아 케잔시를 둘러보던 이나리우스는 이런 다짐도 합니다. '이번 일을 마무리하면 성역을 다시 꾸미리라. 드높은 천상조차 부러워할 나만의 드높은 천상을 만들겠다!'(죄악의 전쟁 2권: 용의 비늘)
 
성역은 천상과 지옥에서 도망친 천사와 악마들이 세계석을 이용해 만든 낙원이었다. (사진=블리자드)
 
자식을 혐오한 아버지, 이나리우스
 
이나리우스의 힘이 어느정도이기에 성역을 마음대로 파괴하고 다시 지을 생각을 하는 걸까요. 그는 자신과 성역의 기반인 세계석을 완전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성역 안에서 가공할 힘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드높은 천상의 앙기리스 의회가 성역을 발견하는 날, 더는 세계석에서 힘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상이 성역의 존재를 알면, 자신들을 위협할 잠재력을 가졌고 악마의 군대로 쓰일 위험도 있는 인간 세상을 없애려 할 게 뻔합니다. 게다가 이나리우스는 천상을 버리고 악마와 결혼해 혼혈종까지 낳은 배신자입니다.
 
이나리우스와 릴리트의 직계 자손 '라트마'가 울디시안을 세계석 앞으로 데려가 들려준 이야기도 자식들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이나리우스는 네팔렘을 질병이자 불명예로 여겨 없애고 싶었지만, 성역을 함께 만든 동료들의 반대 의견 때문에 숙고하자고 했을 뿐입니다. 릴리트가 자식을 지키려고 다른 악마와 천사를 몰살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인류를 없앤 뒤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변덕스런 아버지는 아리앗 산에 숨겨둔 세계석의 공명을 바꿔 네팔렘의 힘을 대를 이어 약화시켰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항했다 진압된 자식 중 한 명이 라트마입니다. 라트마는 성역과 함께 생긴 용 트락울의 제자가 되어,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추며 성역의 존재를 천상에 들기키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어머니는 자식들을 부추겨 네팔렘 군대를 만들려 하고, 아버지는 자기 권리를 찾는 자식에게 '내 맘대로 할 권리'를 내세워 아들 딸을 진압하려 합니다.
 
콩가루 집안의 장남 라트마는 자기 세상을 완벽히 통제하길 원하는 아버지를 힐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네팔렘이라는 개념은 그를 진저리나게 했던 거야. 그가 세계석을 차지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 그리고 드높은 천상과 불타는 지옥의 눈으로부터 성역을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석의 공명을 바꿔 놓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죄악의 전쟁 2권: 용의 비늘)
 
릴리트는 이 세계석의 공명을 전 남편 몰래 바꿔 인류가 네팔렘의 힘을 각성하게 만듭니다. 울디시안이 강해진 건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장남' 라트마는 아버지와 얼마나 사이가 나쁠까요. 울디시안에 이어 그의 동생 멘델른을 세계석으로 데려가려던 라트마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부자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나리우스가 "네게 실망했다"고 하자, 아들은 "제가 태어난 이후로 당신이 실망하지 않은 적은 없겠지요, 아버지"라며 신랄하게 응수합니다.
 
그리고 네팔렘이 세계석을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이나리우스와,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려는 아들 간의 언쟁에서 이나리우스의 인간관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성역은 반드시 순결해야 할지니"라고 말 하자,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파멸을 맞아야 한다는 건가요?"라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하다는듯이 대답합니다. "내 의지로 인해 존재하는 것들이니, 그래야겠지…."(죄악의 전쟁 2권: 용의 비늘)
 
이윽고 이나리우스가 아들을 '리나리안'라 부르자, 라트마는 부모를 부정한 순간부터 그 이름을 버렸다고 되받아칩니다. 라트마는 용 트락울이 자기 이름을 버린 제자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아들이 말을 듣지 않고 세계석으로 향하려 들자, 아버지는 "내가 이곳의 운명이다. 성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하라, 마라'는 내가 결정한다"며 주변의 땅을 뒤엎습니다.
 
자아도취 아버지는 수 틀리면 성역을 다시 만들려 하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미친 복수극의 무기로 쓰려 합니다. 인류의 부모에게 자식이란 유용한 병사이거나, 자신을 숭배하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릴리트는 다시 기회를 노립니다. 그녀는 성역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에서 전 남편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인류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농부의 혁명은 과연 성공할까요.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 이범종

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