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사태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시민
입력 : 2015-11-03 18:49:38 수정 : 2015-11-03 18:49:38
난민 문제가 계속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뿐 아닌 다른 나라들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재고해 보는 계기를 가져보자. 다음은 The New York Times 가 2015년 9월 5일에 보도한 내용이다.
 
더 뉴욕 타임즈. 사진/바람아시아
 
비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보고 있다. 부다페스트 동역(켈레티역)의 장면, 터키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유아, 목숨을 걸고 그리스 섬으로 야반도주를 하는 시리아인 가족 등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유럽의 문제라고 말한다.
 
시리아 내전은 4만 명 이상의 난민을 야기했고, 미국은 이들 중 1500명을 수용했다. 미국과 이들의 동맹국은 시리아 내의 이슬람 국가들과 전쟁 상태에 있다. 이들의 입장에 있어 난민이 위협적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 아니다. 우리가 시리아 내전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이들이 시리아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난민 문제가 유럽 문제에 해당된다며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국가는 비단 미국뿐 만이 아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라고 자부하던 나라들을 보면, 캐나다는 8월에 1074명, 오스트레일리아는 2,200명 이하, 브라질은 5월에 2000명이 채 되지 않는 수를 수용했다. 가장 심한 건 석유 국가다. 국제사면위원회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Gulf 주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시리아 난민을 한 명도 수용하지 않았다. 수 년 동안 시리아로 무기를 보내왔던 이들은, 4만 명의 사람들이 피난을 원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발등에 불은 터키,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에 떨어졌다. 유엔 난민기구는 이들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데 실패했다. 난민 캠프의 위생 상태는 한계에 이르렀다. 국제 사회가 이들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러시아 또는 미국이 전쟁을 끝내도록 힘을 가하지 않는다면, 이제 난민들은 더 이상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비난을 돌리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난민들이 문서가 없는 불법 입국자라는 등 핑계를 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비유럽 국가의 정치적 움직임은 유럽 내의 마비 상태와 서로를 탓하는 태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 UN의 난민 등록 시스템은 초과되어 버렸다. 헝가리와 같은 나라는 그들 스스로 난민들을 재정착 시킬 수 없음을 선언했다. 확실한 해결방안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브라질 등의 국가들이 부다페스트, 아테네와 같은 중요 유입지점으로 난민 등록과 허가 진행을 위한 인력을 보낼 의향이 있다는 것을 발표하는 것이다.
 
각 국가별로 목표치를 정해야 하는데, 캐나다와 미국의 경우에는 처음 단계에서 최소 25,000명이 적정하다고 볼 수 있다. (내년까지 5000명에서 8000명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미국의 최근 선언은 사실 그 수가 너무 적다.) 교회와 사원, 지역 사회단체 그리고 각 가정은 난민의 재정착과 후원에 힘을 보탤 수 있다. 헝가리,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와 같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 국가들에게 이런 도움은 더욱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오바마 대통령, 스티븐 하퍼 총리, 토니 애벗 총리,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등은 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난민들의 재정착은 더 많은 수의 난민 유입을 불러올 것이다. 지도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 집단적 이동이 야기할,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의 혼란이다. 이는 각국의 수용 할당량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절차의 간소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의 국가는 그들에게 어떠한 압력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안타까운 사진들이 이 압력을 가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난민 수용은 대규모 인구 이동이고 세계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 정부들이 시리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난민들을 돕지 않는다면, 밀항자들과 인신매매업자들이 증가하고, 그로 인한 불법 통행세가 상승하게 될 것이다.
 
유럽이 다른 민주 국가들이 함께 이 과제를 해결할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 역시 더욱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고, 1951년의 난민 협약을 개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전과 나라의 붕괴와 흉악한 시민군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사람들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것이다.
 
캐나다는 1956년 말에 정부 관료를 비엔나에 보냈다.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후, 수백 명의 헝가리인들을 돌볼 센터를 지원하고, 그들을 캐나다로 유입하기 위해서였다. 헝가리인들은 그들이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지만, 그들 역시 한때 난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은 수많은 베트남인들을 수용했다. 이때 역시 많은 난민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있었다. 실제로 그러했지만, 이 베트남과 헝가리 난민들은 훌륭한 시민으로 적응해 나갔다.
 
시리아인들에 대한 연민은 왜 아직도 발휘되지 않을까. 시리아인들은 정부에 의한 알레포에서의 폭격, 고문과 납치, 지하드 군과 그 반대편인 의용군에 의한 대량학살까지 당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그들은 난민캠프에서 “국제 사회”가 그들을 도와주기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그들은 배와 기차를 타고 벗어나려 하는데,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생각은 철사로 된 방어망과 경찰 인원 증대뿐이다.
 
인권과 난민 보호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이야기해왔던 것을 생각해라. 부다페스트 기차역 밖에서 천막을 치고 거처하는 시리아인들을 보자. 이들이 아니라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우리가 말해왔던 것을 진심으로 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증오를 마음에 품은 세대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연민이 아니라면,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관점에서라도 이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안양외국어 고등학교 김가영 기자 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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