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5화)뇌물을 다스린다는 것
“이 땅은 뇌물의 천하 크게 번성하도다”
입력 : 2016-09-26 06:00:00 수정 : 2016-09-26 06:00:00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의 시행이 모레로 다가왔다. 최초의 제안으로부터 2015년 3월 27일 법률로 제정되기까지 곡절도 많았고, 그로부터 또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6년 9월 28일에 시행되기까지 의견도 분분하지만, 여론은 공직비리에 지친 국민들 대다수가 이 법의 시행에 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이 적용되는 대상자들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자체교육이 실시되고, 10월에 열릴 예정이던 행사들이 9월 28일 이전으로 앞당겨졌다는 소식들도 들려온다. ‘뇌물의 역사’가 동서고금에 뿌리 깊기는 하지만, 한국이 고질적인 ‘접대문화’를 탈피할 때도 되었다.
 
선물과 뇌물 사이, 세종(1397~1450)의 정책
국회입법과정에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제안했던 원안(2011년 가칭 '공직자의 청탁수수 및 사익추구금지법', 2012년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의 내용이 몇 가지 점에서 후퇴를 겪게 되는데, 그 중 가장 큰 아쉬움은―명칭의 변화에서 보이듯이―공직자로 하여금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직무를 맡지 못하게 하는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 규정이 삭제된 것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고위 공직자들이 자녀의 취업 청탁을 하는 경우에 대한 방지 조항이 빠진 셈이다. 그 외에도, 금액과 직무관련성을 따져 구분하는 것(원안은 금품 수수만으로도 형사처벌이나 과태료 처분), 법 적용을 받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로 한정한 것(전직 대통령들의 자녀와 형제들이 일으킨 사건들을 상기하자),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이 제3자의 고충민원을 공무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부정청탁이 아니라는 예외를 국회의원들이 만들어 넣은 것 등이다.
 
<뇌물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조선시대식 ‘김영란법’을 세종대왕이 시도했던 역사가 드러나 있다(임용한ㆍ김인호ㆍ노혜경 공저, <뇌물의 역사>, 이야기가있는집, 2015, 306~316쪽). 김영란법에 의하면, 공직자가 1회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았을 때 직무관련여부 및 명목에 관계없이 처벌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대가성이 증명되지 않는 후원 형식의 뇌물(이른바 ‘스폰형 뇌물’)은 조선시대에도 선물과 뇌물 사이 또는 ‘인정’과 뇌물 사이를 오가며 비리를 정당화했다.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1397년)의 뇌물금지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던 시절, 1424년에 세종은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양자 모두를 처벌하는 새로운 뇌물금지법을 제시한다. 대신들이 '늙은 대신들의 건강과 몸보신을 위해 받는 작은 물건'은 괜찮다는 식의 예외조항을 운운할 때 그것을 묵인하면서도 세종은 2년 후인 1426년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마침내 1447년 제주목사 이흥문의 뇌물사건을 계기로 양자처벌법안을 만들었다. 이흥문의 상납을 받은 한양 대신들 중에는 청렴한 이미지로 알려진 당시 영의정 황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뇌물 천하’라 일컬어지는 조선시대, 중기로 들어서는 광해군(1575~1641) 시절의 뇌물 풍속도를 <만인보>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국보 제135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사진/문화재청
 
광해군의 신하라
자는 면숙이요
호는 월탄이라
 
광해군의 어두운 눈앞에 알짱거려
우의정
좌의정까지 높아오르더니
마침내 궁녀의 궁둥이 따라다니며
오대산 산삼 한 뿌리 바치고 나서
마침내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으니
그 위에 오직 한 사람
그 아래로 까마득히 억조창생은 아니나
천만창생 펼쳐졌도다
< … >
 
그리하여 산삼 재상 한효순 한대감이여
그 아래 이충은
정성껏 술안주 잡채 바치고 바치더니
호조판서에 뛰어올라
그는 잡채 판서 되었다
 
하기야 이제 때가 무르익어
천민도 뇌물로 군수가 되고말고
현감이 되고말고
눈치 재빠른 종노릇 그만두고
눈치 재빠른 벼슬아치가 되어
이 땅은 뇌물의 천하 크게 번성하도다
(‘산삼 재상’, 6권)
 
선조의 상궁
진작 광해군에 붙어
궁중의 권세 다 틀어쥐고
그가 걸어가는 데마다
금이 쏟아지고 옥이 흩어졌다
광해군께오서 뇌물 받고 벼슬 내리시면
그 뇌물은 김개똥이 치마폭이 다 받았다
 
반정군의 칼 받아 목 날아갈 때까지
그 돈은 다 받아 쌓아두었다
 
< … >
(‘김개똥’, 9권)
 
광해군의 판단을 흐리는데 으뜸 역할을 한 상궁 김개시(김개똥)가 얼마나 뇌물을 좋아했는지는, 그녀가 인조반정 직전 반정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을 배신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광해군은 반정에 대한 상소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김자점의 뇌물을 받은 김개시의 말만 믿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탕왕의 6가지 반성과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
<뇌물의 역사>의 저자들은, 뇌물은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야 하는 암세포와 같고(앞의 책, 4쪽), “뇌물죄는 거대 범죄이면서 소소한 일상의 범죄이기도 하다”(5쪽)라고 말한다. 이 책의 1부는 “은나라 탕왕의 6가지 반성을 통해 보는 뇌물의 역사”(15~100쪽)를 다루고 있는데,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을 추방하고 은나라(기원전 1600~1046)를 세운 탕왕이 왕위에 오른 뒤 7년 동안 흉년이 들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6가지의 잘못을 적어 반성한 내용을 뇌물과 관련해 해석한 것이다. 탕왕의 6가지 반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가 절제되지 않고 문란하지 않은가? 둘째,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경제가 어렵지 않은가? 셋째, 궁전이 화려하고 사치스럽지 않은가? 넷째, 여자의 청탁이 성하고 정치가 불공정하게 운영되지 않는가? 다섯째, 뇌물이 성행하지 않는가? 여섯째, 참소로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고 있지 않은가?”(17쪽)
 
조선의 왕들이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 탕왕의 이 반성문을 열심히 활용했다고 하는데, 성종(1457~1495)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종의 장인이자 성종의 숙부인 선왕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권신 한명회(1415~1487)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예종의 아버지이자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의 최측근으로,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왕 3대에 걸쳐, 비록 요절했지만 두 딸을 왕후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계의 온갖 친인척관계로 권세를 휘두르던 그가 얼마나 뇌물을 받았을지는 상상할 만하다.
 
73년을 다 살기도 어려운 시절
그래서 70년은 예로부터 드문 일
고희인 것을
허허 73년을 벼슬로 벼슬로
그 영화 길고길었다
 
김종서를 죽여
세조를 세워
어린 단종을 죽여
세조를 튼튼히 세워
 
이어서
성종을 세워
선왕이나 금상
임금마다 사위를 삼았다
 
송나라 승상 한충헌의 정자 압구정을
그대로 흉내내어
그렇지 한명회야말로
그 칠삭둥이 재주로
명나라 산하와도 두루 가까워
한강 기슭에 압구정을 세웠다
 
갈매기 대신
팔도에서 뇌물짐 몰려오고
연초록 같은
진초록 같은
미녀 진상 끊이지 않았다
 
70년대에 이르러
그 시절의 영화가
새로 일어나는 것인가
< … >
 
새로이 한명회 1만명이 모여드는가
(‘한명회’, 11권)
 
한명회 묘지명 파편.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묘지명(墓誌銘)에서 당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읽는다. 사진/뉴시스
 
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명회는, 송나라 정승 한충헌(한기)이 황제를 새로 들이는 공을 세운 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노닌다'는 뜻으로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살았던 것처럼, 자신을 한충헌에 빗대고 그의 정자를 본떠 한강변에 정자를 짓는다. 자신의 호로 삼고 정자에 이름 붙인 ‘압구정’이라는 명칭은 사실 명나라의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에게 청해 받은 것으로, 예겸은 한명회에게 한충헌처럼 기심(機心), 즉 '조작하는(일을 꾸미는) 마음‘을 버리고 무심히 갈매기와 벗 삼기를 권하는 뜻으로 압구정이라는 이름과 기문을 지어준 것이다. 그러나 기심(機心)을 버리기는커녕 압구정에서의 호화로운 잔치와 밀려드는 뇌물들 속에 갈매기는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손님들에게 과시하려고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친 문제로 유배되어 가다가 곧 사면되어 풀려나기도 했다 하니, 한명회의 이중적 면모에 당시 사람들이 압구정의 ‘친할 압(狎)’자 대신 ‘누를 압(押)’자를 써서 그를 비꼬기도 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는 1485년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 접대한 일로 결국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친일부역자의 뇌물 범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고종의 5촌 조카 이지용과 그의 처 이옥경의 행적을 하나 시로 보자. 1904년 2월 그가 외부대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듬해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당시 그는 내부대신으로 조약에 찬성하고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는다.
 
조선시대 여자는 이름이 없었다
홍씨 가문의 계집아이 하나가
고종의 입양조카가 된다
잘 익은 구기자열매 빛 입술
 
그 아이가 자라
일본으로 떠나는 특파대사 이지용의 마누라가 되어
경(卿)이라는 이름 달아 함께 갔다
 
남편 성 따라 이씨가 되었다
이경이었다
살결이 백옥이요
이빨이 설옥이라
이옥경이었다
 
일본 가서 1만엔을 뇌물로 받고
한일의정서
러일전쟁 공수동맹 체결하여
조선반도가 일본의 군사기지가 되어버렸다 겁 없는 부부였다
 
그 이래 용산 일대
1백15만평은
임진왜란 일본군 주둔 이래
언제나 외국군 군용지가 되고 말았다
 
< … >
(‘백작부인 이옥경’, 14권)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을사오적이다. 사진은 애국가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윤치호. 그는 친일파로 전향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조사하는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의 연도별 변동 추이를 2011년부터 살펴보면, 한국은 2011년 43위(조사대상 183개국), 2012년 45위(176개국), 2013년 46위(177개국), 2014년 43위(175개국), 2015년 37위(168개국)이다. OECD 회원국 34개국 중에서는 일관되게 27위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과 친일부역자들의 부정부패가 오늘날까지 계승되는 우리 사회도 이제 좀 투명하게, 부패인식지수 순위를 상향조정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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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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