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우리 안에도 양진호가 있다
입력 : 2018-11-09 06:00:00 수정 : 2018-11-09 06:00:00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미래 희망이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빗대 청춘들은 ‘헬조선’이라고 한다. 어린이집부터 시작해 유치원을 거친 다음 12년간의 정규 교육을 받지만 정작 사회에 나와도 좋은 취업자리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힘들게 취업을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 행복한 장소가 못 된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기업인으로 알려졌던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직원 폭행은 대한민국을 충격과 분노에 빠트렸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더 좋은 직장을 찾아 헤매는 청춘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기는 사건이었다. 성공한 기업인처럼 보였던 양 회장은 동영상에서 전직 직원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폭언을 마구잡이로 일삼는 ‘갑질 회장’으로 등장한다. 저항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직원의 모습을 보며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직장에서 갑질은 얼마나 심각하고 어떤 얼굴로 등장하고 있을까.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갑질로 넘쳐나고 있다. 한국리서치가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지난 8월 17~20일 실시한 조사(전국1000명 인터넷패널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 자세한 사항은 조사기관의 홈페이지에서 확인가능)에서 ‘우리 사회의 갑질 실태에 대한 평가’를 물어본 결과 ‘심각하다’는 응답이 무려 96%였다. 정신적인 충격이 되는 갑질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사회적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일상 사회관계에서의 갑질이 얼마나 심각한지 물어본 결과 ‘고용주와 직원’ 사이는 무려 93%에 이른다.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고용주로부터 갑질 경험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 사회 첫발을 제대로 딛기도 전인 인턴과 견습생도 고용주로부터 상당한 갑질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선량하고 사려 깊은 고용주가 왜 없겠는가. 그렇지만 고도 성장시기의 후진적인 노사 관계와 비교하면 직장문화는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직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갑질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한다면 민주적 기업 문화가 만들어지겠는가.
 
갑질 문화가 뿌려 뽑혀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그 유형이 너무 다양하고 초래되는 결과는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양진호 회장은 많은 동료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원이었던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고 거침없이 폭행을 저질렀다. 갑질을 당한 직원은 앞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 갑질은 폭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갑질 횡포는 인격모독성 폭언이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까지 있지만 폭언은 그 자체로 인격 살인이다. 이 외에도 근로계약 불이행, 사생활 침해, 인사상의 불이익, 직장 내 따돌림, 은밀한 괴롭힘, 성희롱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갑질의 유형은 다양하다. 겉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직장내 괴롭힘에 만성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 청춘들의 삶은 어떤 보상조차 없이 멍들어 가고 있다.
 
갑질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갑질이 갑질을 낳는다는 것이다. 양 회장의 폭행 동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충격적인 장면에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다. 뉴스를 접한 사람들에게 출세한 기업인 양진호 회장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양 회장을 비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최근 사회 분위기이지만 정작 나에게 ‘양진호’가 있지는 않은지 되묻게 된다. 이번 조사에서 갑질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갑질을 하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결과는 놀랍다. 갑질을 매우 자주 당하는 사람들의 57%는 갑질을 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주와 직원’ 사이가 아닌 같은 직원인 ‘직장상사와 후배직원’ 사이에서 갑질 심각성이 74%나 되었다. 고용주에게 갑질을 당한 같은 직원이지만 직장상사가 후배직원들을 향한 갑질은 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고용주로부터 갑질을 당한 직원들 사이에서 갑질은 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는 의미다. 물론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직장 내 괴롭힘과 갑질을 근절할 개정 근로기준법을 잠자게 만들고 있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책임이 크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속에 자라고 있을지 모르는 갑질 근성을 잘라내는 일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안에도 ‘양진호’가 있다. 인간에게 지킬도 있고 하이드도 있다는 얘기다. 갑자기 섬뜩해진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jcbae@rand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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