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기획2050)⑩'포용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
포용국가의 핵심은 개인과 기업, 지역, 공동체의 역량 강화
구성원들이 스스로 삶의 역량 키울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
입력 : 2018-12-10 07:00:00 수정 : 2018-12-10 07:00:00
"국가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아무 때나 던질 말이 아니다.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대답이 시민적 설득력을 얻을 때 비로소 새 국가론이 역사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 근대 이후로도 숱한 국가론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국가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지금 한국에서는 새 국가론으로 '포용국가론'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것은 역사에 남을 국가론이 될 수 있을까. 포용국가가 문재인정부의 반짝 담론으로 그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속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보다 지금 왜 포용국가를 말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시민에게 명쾌한 대답이 쥐어져야만 포용국가론은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빛난다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니듯 말이다. 
 
9월6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포용국가 전략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앤서니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과 영국 노동당

최근의 국가론 중에서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것은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 주창한 '사회투자국가론'이다. 그러나 이 책을 펼쳐보면 '기든스는 돌팔이(Charlatan)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책에는 정작 사회투자국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서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됐는데, 그냥 4장의 제목에 밑도 끝도 없이 사회투자국가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도 사회투자국가에 대한 개념 정의를 찾을 수 없다. 혹시 이 책은 기든스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어느 공항에서 잠깐 에세이로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책 어느 중간에 '인적자본에 투자하는 국가'라는 말과 '사회투자국가는 복지국가와 달리 시장과 국가가 결합해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적힌 게 전부다. 기든스의 사회투자국가론에 대한 더 짙은 불신은 이 책이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집권한 이듬해 출간됐는 점이다.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면 기든스는 책을 통해 20여년 만에 집권하게 된 영국 노동당의 지적 스승이 되는 것에 만족한 게 아닌가 싶다.

시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어떤 정권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청사진이 제시된다. 사회투자국가론이 기든스에 의해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앞서 4년 전인 1994년 영국 노동당 사회정의위원회가 작성한 한 권의 보고서에서 출발했다. 보고서에는 당시 영국에서 제기된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해답이 담겼다. 노동당은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2년의 숙고와 성찰을 보냈다. 수차례 총선에서 패배한 노동당은 그만큼 절실했다. 사회정의위원회의 문제의식은 지금 한국에서 포용국가론이 제시해야 할 질문과 해답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들은 단지 당면한 선거전략이나 강령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장래 10~20년 후 영국사회의 변화에 주목했다. 보고서의 부제가 '국가개조 전략(Strategy for National Renewal)'일 정도로 사회정의위원회는 총체적 국가 쇄신전략을 제시하고 새 국가 모델을 제안하려고 했다. 이는 사회투자국가에 관심을 가진 영미권 학자들의 연구보다 훨씬 폭넓은 관심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노동과 일자리 문제, 복지전달 체계, 조세 개혁, 평생학습 등이 국가전략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닐 키녹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영국 노동당을 이끌었다. 당시 노동당은 3번의 총선에서 연거푸 졌지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국가개조 전략을 내놨다. 사진/뉴시스

당시 닐 키녹이 이끈 노동당은 3번의 총선에서 연거푸 졌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국가개조 전략을 내놨다. 이 과정을 따라가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포용국가란 무엇인가'와 그에 따른 국가개조 전략의 해답은 어떠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회정의위원회는 1992년에 꾸려졌다. 영국 노동당은 선거 패배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복지국가가 더는 옛날의 모습으로 지탱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지국가 다음으로는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 그들은 1940년대 초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 등이 설계한 복지국가 모형으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복지국가의 기반 위에 새 국가 모델을 만들고 국정운영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복지국가 설계도 이후 50년이 지나 변해버린 세계


베버리지 등이 복지국가를 설계할 때는 남성가장 모델(Male Breadwinner Model)이라는 가족 형태를 기초로 삼았다. 20세기 초반 영국과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10대 후반까지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에 공장에 취업한 남성을 전형적 노동자로 간주했다. 이 남성은 전업주부로 살아갈 여성과 결혼, 2명의 자녀를 낳고 60살 전후까지 공장에서 일한다. 남성은 은퇴 후 아내와 국민연금을 받으며 60대 후반이나 70대까지 산다. 이런 생애주기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주어지는 복지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남성이 직장에서 일하며 받는 고정급으로 4인 가족이 생계를 잇고 무상교육에 가까운 자녀 교육도 가능하다. 주택은 공장에 딸린 공공주택일 가능성이 크다. 가족이 아플 때를 대비한 건강보험, 가장이 일시적으로 실직했을 때 받는 실업보험, 가장이 직장에서 상해를 입었을 때 도움을 받는 산재보험, 은퇴 이후 삶을 위한 국민연금 등도 마련됐다. '모든 시민에게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이 보장'되도록 하는 게 복지국가의 이상이었다.
 
복지국가의 이상은 '모든 시민에게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화면서 사회경제적 환경도 변하고 복지국가를 처음 구상할 때의 여건도 바뀌었지만, '시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유효하다. 사진/픽사베이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2년의 세상은 달라졌다. 베버리지 등이 복지국가를 설계할 때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많이 변했다. 우선 평생직장이 사라졌다. 20대에 취직해 60대까지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예외적 현상이 됐다. 사람들은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직장을 다니거나 실업상태거나 새 일자리를 위한 학습이 보장되고 실업보험을 받을 수 있고 재취업을 정보를 제공 받는 게 중요해졌다. 일자리의 안정성보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ctive Labour Market Policy)이 요구됐다.
 
복지국가의 표본이 된 남성가장 모델도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이 아니게 됐다. 부부와 2명의 자녀를 둔 4인 핵가족 시대가 지나버렸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면서 부부가 아이를 안 낳거나 이혼과 비혼 등으로 다양한 가족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혼이 아닌 형태의 가족 구성도 증가하고 있다. 영국은 이미 1990년대부터 남성가장 모델에서 양성돌봄 모델(Dual Career Model)을 거쳐 더욱 다양화된 가족 형태의 세상으로 진입했다.
 
"새 국가 모델을 찾자"…1992년 영국과 2018년 대한민국

영국 노동당의 사회정의위원회는 이런 조건 속에서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찾고자 조직됐다. 그리고 2년의 성찰을 거쳐 1994년 사회투자국가를 새 미래로 제안한 보고서가 탄생했다. 보고서는 영국의 미래를 3가지 모습을 전망했다. ▲전통적 복지국가의 미래인 평등주의자의 영국 ▲신자유주의자의 미래인 탈규제주의자의 영국 ▲사회투자국가의 미래가 된 투자자의 영국 등이다. 보고서는 베버리지로부터 50년 뒤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고려할 때 영국의 미래는 '투자자의 영국'이 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청사진이 있었기에 토니 블레어가 집권과 그 이후 10년 이상 진보정당 시대가 가능했다. 정치세력은 튼튼한 정신적 가치와 미래비전이 있어야만 10년 이상 장기 집권할 수 있다.
 
1997년 11월21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지속된 발전국가 모델이 종식을 고했다. 사진 왼쪽부터 미셸 캉드쉬 IMF 총재, 김영삼 대통령. 사진/국가기록원
 
2019년을 이제 겨우 한 달 앞둔 한국사회에 던져진 질문도 1992년 영국에서 제기된 질문과 같다. 김영삼 정부까지 지속된 발전국가 모델은 외환위기(IMF)와 함께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개혁도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국가란 무엇이며, 대한민국 정부는 촛불혁명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다시 국가론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청년들은 결혼을 마냥 미루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숫자가 늘고 있다. 심각한 것은 그런 결정이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삶의 압박감 때문에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3명의 자녀를 갖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됐다. 이런 상황을 겪는 국가는 지속가능성에서 근본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져야 한다. "해방 이후 70년의 압축성장의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라고.

학습과 사람중심 기업 통해 개인 역량 키워내야

 
'국민의 집'을 상상해보자. 1920년대 스웨덴 복지국가 설계사들이 꿈꾼 국민의 집은 영국 대규모 공장을 근간으로 한 산업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2019년 대한민국의 포용국가가 설계하는 국민의 집은 1920년대와는 삶의 조건이 전혀 다르다. 1920년대의 세상은 이제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포용국가는 복지국가와 어떤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가 하는 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포용국가의 첫번째 대답은 '역량강화를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일자리 상당 부분이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행복과 직결된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사진/픽사베이

포용국가의 핵심고리는 개인과 기업, 지역, 공동체의 역량 강화다. 한국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지도 않고 역사적 자본이나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부귀를 누릴 나라도 아니다. 한국의 국가생존 전략은 사람이다. 이 나라는 인적자원을 어떻게 교육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개인과 기업,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 사람에게서 답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발전국가 시대의 저임금 정책만으로는 미래가 없다. 학습기회를 통해, 사람중심기업을 통해 개인의 역량을 키워내고 삶의 자생력을 갖추도록 하는 게 포용국가의 역할이다.

복지국가의 국민의 집은 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1차적 목표였다. 반면 포용국가의 국민의 집에서는 구성원들이 스스로 삶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 절대적 사명이 됐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다. 고용 위기, 공동체의 해체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다. 협력보다 경쟁이 우선시된다. 포용국가는 지난 30년 동안 피폐해진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 개인의 회복탄력성은 무엇인가. 국가는 어떤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가. 개인의 역량 강화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포용국가는 '역량개발자로서 한국'이라는 미래를 묻고 있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는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 중이다. 또 문재인정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공공정책분과 위원장으로 국가 미래전략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30년 후의 국가비전을 모색하는 이번 기획은 격주로 총 15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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