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8화)땅과 더불어 일군 정직한 노동의 삶
“노래 하나 농사꾼 차지로다”
입력 : 2019-01-14 08:00:00 수정 : 2019-01-14 08:00:00
2018년 12월8일 국회가 통과시킨 2019년 국가전체 예산은 469조5751억으로 전년 대비 9.5% 증가했다. 이 중 농림축산식품부의 예산과 기금은 총 14조6596억원으로 2018년보다 1.1% 증가에 머물렀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조정된 내용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쌀 변동직불금으로, 정부안 5775억원 중 3242억원이 감액된 2533억원의 예산으로 확정되었다. 늘 먹는 쌀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왜 농민들이 상경해 국회 앞에서 ‘밥 한 공기 300원 보장, 직불제 개편 밀실야합 중단’을 외쳐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별 관심도 없다. 그것은 겨울 한파보다 시린 현상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인근에서 쌀가격 인상을 촉구하면서 트랙터를 국회에 배치해 놓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토록 어려운 ‘밥 한 공기 300원’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이어진 국민들의 평화적 촛불시위의 시초는 2015년 ‘민중총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015년 11월14일 제1차 민중총궐기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2016년 9월25일 세상을 떠난 고 백남기 농민은 당시 ‘밥쌀 수입 반대’를 외치며 경찰의 차벽 앞에 섰었다. 우리 국민은 촛불의 힘으로 2017년 3월10일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고 5월10일 문재인 행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2018년 12월13일 정부는 3만7000톤의 ‘밥쌀 수입 결정’을 공고했다. 80Kg기준 쌀 목표가격 24만원, 밥 한 공기(100그램 기준) 300원을 몇 달째 요구해온 농민들이 1박2일 국회 앞 철야천막농성을 마치면서 듣게 된 소식이다.
 
사실 현 정부는 출범 이틀을 앞둔 2017년 5월8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TRQ(Tariff Rate Quota·관세율할당) 물량으로 쌀 6만5000톤을 수입하고 이 중 밥쌀을 2만5000톤 수입하겠다고 공고함으로써 전 정부가 떠넘긴 부담을 안고 시작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과 함께 1995년 한국의 농산물 시장이 개방될 때 쌀을 예외로 하는 대신, 정부는 매년 증가되는 저관세 의무수입물량을 소화해왔는데, 이중 밥쌀용 쌀이 전체 의무수입물량의 30%를 차지하는 조건이었다(두 번째 유예기간 10년에 해당). 두 차례에 걸쳐 총 20년간 유예 받았던 쌀 관세화가 2015년부터 시작되면서 정부는 쌀 관세율을 513%로 정했고 이와 동시에 ‘밥쌀용 쌀 의무 수입 조항’은 폐지되었다. 한편, WTO의 규정에 따라 5%의 관세가 부과되는 TRQ 물량 40만8700톤 내에서 쌀을 수입하는 것은 계속되었는데, 문제는 이 수입쌀을 밥쌀용·가공용에 상관없이(‘밥쌀용 쌀 의무 수입 조항’이 폐지되었으므로) 들여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정부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밥쌀용 쌀을 수입해 왔다는 것이고 현 정부 역시 그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밥쌀용 쌀의 수입이 쌀값 하락을 가져온 것은 자명한 일이다.
 
혹 정부의 변명대로, ‘밥쌀용 쌀’을 수출해 온 미국과 중국이 밥쌀용 쌀을 수입하지 않으면 이를 문제 삼아 관세협상에 딴지를 건다할지라도, 우리 농민의 생존권이 먼저이지 강대국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정부가 담대한 배짱과 번뜩이는 지혜로 전략을 짜 그들과 맞설 수는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지난 20여 년간 후퇴한 쌀값에 고통받아왔고 촛불정권이 들어서도 몇 달째 ‘밥 한 공기 300원’을 외쳐야 하는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과 소통할 수는 없는 것인가. 2017년 2월 안성지역 농민간담회에서 ‘밥쌀 용도의 쌀 수입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또한, 쌀 관세화 이후 ‘밥쌀 수입 중단 촉구 결의안’을 발의하고 쌀값 21만7000원을 주장했던 당시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이 된 2018년 쌀 목표가격(80kg 기준, 향후 5년간 적용)을 19만6000원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농민들의 배신감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전북 김제시 공덕농협RPC를 방문해 즉석 간담회를 갖고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농민 수난사
굳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옛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농민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는 잘 알려진 바이다. 그들은 의병이었고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였으며 그 정신을 항일 독립운동으로 계승한 이들이었다. 1960~1970년대 개발독재 산업화 시절에 고향에서 떠밀려 도시빈민이 되기도 했고, 1970~1980년대 민주주의 투쟁의 중심에 선 가톨릭농민회가 되기도 했으며, 1990년대 전국농민회총연맹으로 결집했고, 2016년 겨울 그 소중한 트랙터의 바퀴를 아스팔트에 상해 가며 박근혜 퇴진 집회를 위해 몇 날 며칠에 걸쳐 상경하고 하경했던 전봉준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또한, 물론, 온 국민이 먹을 밥의 생산자, 식량의 생산자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대나 현대나, 농민의 일상은 고단하다. 그런데 그 고단함의 심연은 땅을 향한 노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官)의, 정부의 시책에서 오는 것이고 권력자들의 이해다툼에서, 정파싸움에서 오는 것이리라. 혹독했던 한 시기, 1980년대는 전두환 정권이 지시한 농정을 따르다가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이 자살에 이르게 된 비극의 시대, 실로 ‘정부가 하라는 것의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파탄을 불러온 정부의 무책임한 영농정책에 절망적으로 항의하며 1986년 3월10일 음독, 3일 후인 13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 영농후계자 오한섭(1958~1986) 씨가 남긴 마지막 글은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었다. 
 
말이 좋아 새마을 영농후계자였구려
영농후계자 오한섭
빚만 지는
영농후계자연합회장 오한섭
진실에 눈떠
자신의 실패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독재정치
농민 죽이는 정치의 잘못임을 깨달았구려
미국놈들
미국소 마구 들어와
이 땅의 농민 죽음을 달구었다고
그는 뜻있는 농민회에 가입했구려
1백명 힘이 없지만
1천명 1만명 힘을 모으면
우리는 농산물 가격을
우리 뜻대로 할 수 있으리라
 
그가 기르는 송아지가 죽어갔구려
그 송아지 따라
비닐하우스에서 살충제와 제초제 그라목손 먹었구려
4백20만원 관청 빚 남기고
살아 있는 영농후계자들이 울부짖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이다
후계자들 모두의 죽음이다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그가 죽은 지 한 달 지나
겨우 어느 소식 한 귀퉁이에 알려졌을 뿐
 
어디 농민의 자살 하나뿐인가
소값 폭락으로 죽은 서형석
비관자살의 유창식
여기저기서 빚 자살 늘어났다
김명렬과
그의 어머니도 죽어나갔다
 
< … >
 
어찌 김명렬뿐인가
임실 갈마리 전라선 돌무더기 한 시체가 뻗어 있구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글발
 
본인언(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헐(할)일을 제데(대)로 한(하)지도 못하구(고)
자살함에 대하여
나는 보정이여분게(보증인 여러분에게)
대단히 미안하옵니다
연히(이)나 정부에서 농촌서민에게좋자(조차)
생각하옵기 모순이 있따(다)고 생각합니다
농촌서민에 권장한 모든 물자
시세만 있쓴(으)면 수입하구(고)
농협빛(빚) 1, 2백만 되면 차압
도시대기업체는 몇조을(몇조원을) 띠(떼)이면서도
말 못합니다 시정하여주기 바랍니다
대단 죄송합니다
 
이 환갑 다 된 농부 장만봉
사채 17만원 때문에
집 넘겨주고 셋방 살며
사채와 관채 3백만원에 몰려
죽어버렸구려
천지에 한숨 하나 없이
(‘오한섭’, 별편)
 
전북 고창군 공음면 무장기포지와 무장읍성 일원에서 열리는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 및 무장읍성축제'. 사진/뉴시스
 
군림하는 농협중앙회, 위험한 스마트팜 혁신밸리 
농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문제점들 중 하나는 농협이다. 농업협동조합은 농업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것이 그 임무일 터인데, 그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도는 낮아 보인다. 한국의 농협중앙회는 신용사업(금융), 경제사업(유통·구매·판매), 지도·교육사업을 다 맡아 해왔다. 2012년 금융사업과 경제사업을 지주회사 형태로 분리해 NH농협금융지주와 농협경제지주를 출범시켰지만, 강조점은 여전히 금융사업에 놓여 있다. 
 
농협의 개혁을 주장하는 다음 농민의 말은 농협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농협중앙회의 ‘무이자 자금’ 지원이 일반 조합의 경우에는 매년 평균 약 70억 정도인 반면, 중앙회 이사 조합의 경우에는 약 120억이고 ‘특정 조합’의 경우에는(무슨 조합인지 심히 궁금하다) 약 500억 정도이기 때문에, 이런 무이자 지원을 받기 위해 조합장들이 중앙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중앙회장 선출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국의 조합원은 약 100만 명이고 지역농협 조합장들은 특목 농협을 포함해 약 1200~1300명인데, 이 조합장들 중 200~300명만을 뽑아서 투표권을 주고 중앙회장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기 때문에 거기에 뽑히기 위해 중앙회장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출처: <황동현의 시선집중>, 광주MBC 표준FM, 2018년 9월 20일,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이갑성 협동조합개혁위원장 인터뷰).
 
농가 경쟁력 강화를 주장하며 농림축산식품부가 2014년부터 추진해 온 스마트팜 보급 사업에 대한 농업인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정보통신기술을 농업에 접목해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농업 환경과 관련 산업의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목적으로 ‘스마트팜 혁신밸리’ 프로젝트까지 본격화시키고 있지만, 정작 농민들은 “스마트팜 밸리 조성사업은 농업계의 4대상 사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우려한다(출처: 2018년 7월 9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성명서, ‘스마트팜 밸리 조성사업을 즉각 포기하라!’). 농산물 유통구조에 대한 대책 부재, 대규모 자본의 필요성으로 인해 소·중농을 배제한 대농 중심의 사업이 될 가능성, 결국은 대기업의 농업 진출로 이어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소가 쟁기질 하던 시절과 스마트팜 시대는 비교불가의 격세지감이 있으나, 어느 시절이건 농민들과의 소통을 배제한 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들의 노래 한 자락을 감상할 줄 모른다면 바람직한 정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못자리 뜸부기 울음 떠나고 / 모 쪄 / 모심을 때 / 비로소 사람들 노래하네 / 노래 하나 농사꾼 차지로다 / 부자 양반 / 노래 한 자루 부르는 일 없이 / 에헴 / 이 세상 헛사는도다 / 그렇구나 / 우리 동네 육자배기는 / 도선이 아저씨 그 사람이 제일이지 / 목울대 떨며 나오는 육자배기 / 도선이 육자배기 제일이지 / < … > (‘모심을 때’, 3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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