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최종건과 그리스도 초상화
입력 : 2019-05-02 06:00:00 수정 : 2019-05-02 06:00:00
1950년대 중반, 담연(湛然) 최종건 SK그룹 창업자가 모태 기업인 선경직물을 세운 후 빠른 성장을 이어갈 때였다. 사업으로 바쁜 와중이었지만 담연은 미국에 유학을 간 동생 최종현(SK그룹 회장)의 학비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에 들어가는 자금도 모자랐기 때문에 미국으로 돈을 부칠 때마다 늘 전전긍긍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달러가 귀하던 시절이라 함부로 외화를 외국에 보낼 수 없었고, 그 절차 또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어느 날 담연은 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최종현은 미국에서 ‘그리스도 초상화’가 잘 팔린다고 했다. ‘달러를 부치기가 어려우면 소포로 그림을 부쳐달라. 그러면 그 그림을 팔아 학비에도 보태고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담연은 곧바로 직물의 도안을 담당하는 조용민 도안부 차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리스도 초상화 그림을 틈 날 때마다 되도록 많이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한 조 차장은 곧바로 화집 속의 그리스도 초상화를 말 그대로 똑같이 그려냈다.
 
담연은 조 차장이 그려준 그리스도 초상화들을 포장지에 싼 후 그걸 들고 수원 공장을 나섰다. 당시에는 미국에 소포를 부치려면 서울에 있는 국제 우체국까지 가야했다. 국제 우체국에는 최종현의 초등학교 동창 송상호가 근무하고 있었다. 담연은 송상호에게 동생이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그림들을 소포로 부쳐야 하는 데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평소 동생을 생각하는 형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송상호는 감동해 하며 남은 절차는 자기에게 맡겨달라며 흔쾌히 받았다. 그 때는 달러를 부치는 것도 까다롭지만 소포를 미국에 보내는 절차도 매우 복잡했다. 특히 내용물에 따라 반출 허가가 안나는 것들도 있었는데, 다행이도 그림이라 가능했다. 송상호는 자기 일처럼 이 절차를 빨리 처리해 최종현이 하루라도 먼저 받아볼 수 있도록 해줬다. 이후에도 그는 담연의 부탁을 받고 소포를 부쳐줬다. 후에 담연은 그림을 그려준 조 차장과 송상호에게 물심양면으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담연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공격경영으로 정면으로 승부하라’에 소개된 일화다. 책은 담연의 동생에 대한 사랑은 부정(父情)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가 장남이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란 책임이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특히 미국에 유학을 가 있던 최종현에 대해서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형재애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형제로서가 아니라 나중에 기업 경영의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두 사람 사이의 정서적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작은 정성은 그 내면의 극진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책은 ‘담연은 가장 먼 가지 끝에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줄 아는 큰나무였다. 우직한 듯하면서 자상하고, 강한 듯하면서 여리고, 거친 듯하면서 섬세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고 했다. 그런 담연의 피를 이어받은 손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아쉬울 따름이다.
 
채명석 산업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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