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영화 ‘인간중독’에서의 대령 부인 ‘이숙진’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봉준호 감독은 배우 조여정을 캐스팅하면서 ‘인간중독’ 속 ‘이숙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단다. 봉 감독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의 1등 공신 중 한 사람으로 조여정을 꼽았다.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최고 영광을 만들어 낸 영화적 동반자였지만 굳이 한 명을 꼽자면 봉준호 감독은 조여정을 주저 없이 선택하겠단다. 캐스팅 단계에서도 ‘기생충’ 속 박사장의 아내 ‘연교’ 역할은 조여정이 단연코 1순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여정은 봉준호 감독과 배우 생활 동안에는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며 웃었다. 배우라면 누구라도 한 번 쯤은 함께 하기를 손꼽는 봉준호 감독이다. 조여정은 봉준호 감독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채 꿈만 꾸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첫 만남이 배우 생활 동안 다시는 없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조여정은 아직도 믿기 힘들다며 웃는다.
배우 조여정.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 개봉 이후 며칠이 지난 뒤 만난 조여정이다. 칸 영화제 참석 이후 시차 적응 문제로 아직 피곤이 덜 풀리는 것 같다며 웃는다. 물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생기 넘치는 기운을 내고 있었다. 조여정은 ‘배우 생활 동안 봉준호 감독과는 만날 인연이 아닌가 보다’라며 체념하고 있었단다. 우선 그 이유부터 들어 보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 물론 전례 없는 사건(?)을 함께 만들어 낸 게 조여정이란 점도 아이러니이다.
“배우란 직업을 갖고 있으면 봉준호 감독님은 무조건 한 번은 작업해 보고 싶은 연출자 이시잖아요. 너무 하고 싶었지만 사실 전 포기하고 있었어요. ‘난 안되겠다’ 싶었죠. 감독님 영화를 보면 내 또래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배역이 거의 없었잖아요. 그래서 ‘기회가 있을까’ 기대도 했었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되게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진짜 놀랐죠. 재작년 12월쯤 연락을 받았어요.”
‘기생충’ 속 조여정이 연기한 연교는 처음 캐스팅 단계부터 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중독’을 흥미롭게 본 봉 감독이 조여정을 낙점했었다고. 조여정 스스로도 ‘이상한 느낌’을 많이 좋아한단다. 봉준호 감독도 자신의 영화 ‘기생충’을 연신 ‘이상한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본 관객 들도 그 ‘이상함’에 고개를 끄덕인다. 조여정은 그 ‘이상함’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며 웃는다. 그가 생각한 이상함은 이랬다.
배우 조여정. 사진/CJ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은 진짜 이상한 영화가 맞아요(웃음). 제가 생각한 이 영화의 이상함은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것들이라고 봤어요. 전 스스로가 사고 방식이 아주 평범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진짜 이상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 재미도 있고. 그 기준으로 보면 ‘기생충’은 정말 기발하고 상상력이 차고 넘치는 얘기에요. 이상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죠.”
사실 이상하다고 연신 말을 하고 또 인터뷰 처음부터 피곤하지만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배역을 설명하고 영화를 전해도 그의 연기는 정말 진지했다. 당연히 진지하게 임했다. 평생 바라던 봉준호 감독과의 꿈 같은 만남이니 정말 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배역이었다. ‘인간중독’ 속 ‘숙진’ 캐릭터와 분명히 결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더 발전 시킬 수 있는 틈이 보였단다.
“영화가 특별한 이상함을 지니고 있지만 전 엄청 진지하게 임했죠(웃음). 우선 ‘기생충’ 속 연교는 아주 심플해요. 다층적인 면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 점에서 비교적 연기하기는 편했어요. 저 자체가 불필요한 잡생각을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연교를 연기하면서 많은 것을 비우려고 노력했죠. 비우고 나면 해야 할 게 기택의 가족에게 집중하는 것이었죠. 그들의 자극에 전 반응만 하면 되는 인물이잖아요. 비우고 나선 온 몸의 신경을 기택의 가족에게 집중했어요.”
배우 조여정. 사진/CJ엔터테인먼트
비워내고 집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기생충’ 속 연교의 이미지는 허영심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남편의 성공으로 부잣집 안주인이 된 여자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도 차고 넘치지만 속으로 담겨 있는 내면도 그려내야 했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속내를 끄집어 내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반전 묘미가 재미를 담당한다. 그 재미를 위해 조여정이 담당한 몫은 분명했다. 허영심은 자연스럽게 끌어 나오는 극중 연교의 모든 것이다.
“진짜 초등 영어로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표현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사실 코믹한 장면도 아니고 전 코믹하다고 생각도 못했어요. 전 되게 진지하게 연기했는데 많이들 웃어주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연교가 어떤 여자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 영화 속 그 영어 대사들 같아요, 애드리브라고 착각하실 수도 있는데 100%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들이었어요. 자세히 보면 연교가 남편 앞에선 영어를 안 써요. 오직 과외 선생님 두 분 앞에서만 써요. 그게 바로 봉준호 감독님이 노린 허영심의 민 낯이에요. 하하하.”
조여정의 존재감도 우월하고 그의 반전 매력과 묘미도 탁월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상한 영화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을 드러냈단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상함의 끝은 영화 속 의외의 존재감에서 드러난다. 바로 박사장 네 가사도우미 역할을 한 배우 이정은이 연기한 ‘국문광’ 역할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이상함은 이정은 배우의 힘이 90% 이상을 담당했다.
배우 조여정. 사진/CJ엔터테인먼트
“진짜 소름 돋죠(웃음). 워낙 연기를 잘하던 배우로 소문만 분이셔서. 저도 원래부터 팬이었어요. 대학때 언니 연기를 출연한 연극 작품도 많이 봤어요. 진짜 영화 속에서 함께 하는 장면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언니를 좋아한 팬으로서의 제 사심이 들어간 몇몇 장면도 영화에 들어갔을 정도에요 하하하. 진짜 스포일러가 돼서 자세히 설명은 못 드리는 데 영화 속에서 한 장면은 진짜로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는 데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함께 작업해 보고 싶던 봉준호 감독과의 첫 만남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란 결과를 낳았다. 조여정은 아직도 믿을 수 없고 믿기 힘들다고 놀라워 한다. 발표 당일 침대에서 휴대폰을 보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다 잠이 든 일.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쏟아진 수백건의 축하 문자와 인터넷에 올라온 수상 뉴스. 아직도 생각해 보면 믿기 힘들고 꿈만 같다는 조여정이다.
배우 조여정.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올해 유난히 쟁쟁한 감독님들 작품이 경쟁 부문에 많이 올라왔잖아요. 선배님이나 감독님 모두가 수상은 조금도 예상하지 않고 칸에 갔죠. 다들 칸에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되게 즐거웠죠. 칸에서 평점이 너무 좋단 얘기를 듣고 ‘혹시’ 했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현지에선 여유가 없어서 바로 왔어요. 폐막까지 있을 수 있었다면 너무 좋았었겠죠. 지금도 너무 즐거워요. 행복하고. 감독님을 좋아하게 된 건. ‘도쿄!’를 보고 나서에요. ‘봉준호 감독에게 이런 감성이?’라고 너무 놀았었죠. 그런데 이제는 ‘기생충’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감독님의 다음 작품이 너무 궁금해요. 또 같이 할 수 있다면? 상상 만으로도 즐거운데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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