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사무라이 재팬과 '낙타 바늘'
입력 : 2019-07-30 06:00:00 수정 : 2019-07-30 06:00:00
이강윤 <국민TV> 앵커
2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인도 특집기사 제목을 "소달구지에 핵미사일 싣고 가는 나라"라고 달았다. (당시엔 기발한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조롱도 느껴진다). 그럼 일본은 '게다 신은 사무라이, 기술강국 우뚝'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려나?
 
일본은 아직도 봉건시대 세습 번주들의 나라다. 아베 총리는 3대 째, 고노 외상은 4대 째 대신(大臣)이나 총리대신을 낸 집안이다. 일본의 신민(臣民)-일본에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시민이 '세력'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은 번주의 권력·부 세습을 용인하는 걸까, '넘사벽'이라 포기한 걸까, 아니면 체념한 걸까(포기와 체념은 다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나와는 무관한 세계라 치부하고 아예 생각도 안하는 걸까. 그런데, 과연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치란 매 순간 일상에 작용하고 규율하는데, 외면하거나 무관심해질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런 그들이 촛불혁명으로 무도한 대통령을 끌어내린 걸 '현실적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2차대전 패자이자 전범인 번주들은 패전국에 내려진 징벌로 '사무라이 칼'을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도 비행기를 만들 정도였지만 과학기술을 갈고 닦아 1970년대 후반 세계 최고수준을 이뤘다. 그 바탕에 한국전쟁 특수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칼을 벼려왔고, 이제 다시 공식적으로 칼을 차기 직전이다. '사무라이 재팬'은 보컬그룹이나 영화제목이 아니라, '일본 재군국주의화'의 현재진행형 제목이다.
 
봉건제후 따로 신민 따로인 일본과, 전 국민적으로 정치적 고양을 경험하고 학습한 한국시민·한국정부는 서있는 지점이 다르다. 전혀 다른 판(板.dimension) 위에서 전혀 다른 생각이 부딪히고 있다. 외국어 간에는 통역이 필요한데, 현재 양국 간에는 통역가능자가 없다. 미국은 통역(중재)자가 아니다. 자기 이익과 필요에 의해 두 나라가 자기 우산 속에서 적당히 지내주길 바라는 이해당사자이므로, 객관적 통역자가 될 수 없다. 비유컨대, 미국은 전당포 사장이고, 그가 들고 있는 저울의 눈금은 공정 계량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다.
 
폭발 국면인 한일 현안의 본질은 경제전쟁이 아니라 역사(인식)전쟁이다. 가·피해자간 대립을 넘어 시민주의와 군국주의간의 필연적 마찰이자 충돌이다. 일본은 식민지배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50년 넘게 사과도 배상도 거부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 대법원은 2018년 10월 "정부간이 아닌 일제 피해 개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 박근혜청와대와 양승태대법원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일본 주장에 맞춰보려 재판거래, 즉 사법부에 의한 역사농단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정리하자면, 식민지배불법성을 일본이 부인해서 지난 50년 간 내연돼온 문제가 이번에 터진 것이다. 앞으로의 50년, 100년을 또다시 이 문제로 반복할 수는 없다. 식민지배불법성은 팩트다. 팩트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팩트이고, 팩트 앞에 모두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적어도, 일본이 역사인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데에는 보수든 개혁이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수·수구도 일제의 식민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잖은가.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화 기틀이 마련됐다"는 주장은 본말전도 그 자체다.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이제는 신물도 나지 않지만, 피식민지 조선의 물자수탈과 상품판매를 위해 수행한 작업임을 왜 애써 외면하는가.
 
일본은 이제 아예 대놓고 "문재인정부 중에는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말까지 한다. 누가 봐도, 명백한 팩트를 놓고 우리 내부의 보혁 갈등을 원격 조장하려는 음험한 책략이다. 핵심은 반도체소재가 아니라 역사인식이다. 타인의 역사인식을 수정케 하는 건 낙타 바늘통과 만큼이나 어렵다. 딜레마다. 일본이 식민지배불법성을 인정토록 하는 게 근본적 해결책이다.
 
박정희시절 한일협정과, 박근혜시절의 '비가역적 위안부 합의'. 그 부녀가 망가뜨려놓은 역사의 실타래를 문재인정부가 떠안았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데, 우리 안에서 정쟁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건 역사에 또 다른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원칙 견지를 지지한다. 우리 정부라서가 아니라, 팩트이기 때문에 지지한다.
 
이강윤 <국민TV> 앵커(lkypra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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