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8화)뚤라와 야쓰나야 빨랴나의 톨스토이 흔적
입력 : 2020-10-05 00:00:00 수정 : 2020-10-05 00: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뚤라의 역사 공간과 그 변천
 
역사적으로 ‘무기의 도시’답게 뚤라는 나폴레옹 침략 당시 무기 공급뿐만 아니라 민병대를 조직해 싸웠던 곳이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노동자들이 만든 장갑 열차 ‘뚤라의 노동자’로 독일군을 몰아냈던 곳이다. 또한, 소련 최초의 ‘영원의 불꽃’이 시작된 곳도 1957년 5월9일 뚤라 주 쇼킨스키 군에 있는 뻬르보마이스키라는 한 노동자 마을이었다. 다만, 불꽃이 정기적으로 꺼져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레닌그라드가 첫 번째 장소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이 무기 도시의 군수 관련 공장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는 국방 예산 삭감에 따른 국가의 주문 축소,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한 러시아 무기 판매 시장의 감소 등, 변화된 정치·경제 조건들과 연관된다.
 
뚤라의 정교회 건물들도 역사 속에 여러 번 변모했다. 1520년에 완성된 뚤라의 크렘린 안에는 역사적인 우스펜스키 대성당 또는 ‘축복 받은 성모 마리아 영면 대성당’(1766년)이 종탑과 함께 서 있다. 크렘린 옆에는 붉은 벽돌 벽의 또 다른 우스펜스키 대성당(1902년)이 있는데, 1917년까지 우스펜스키 여자수도원이었던 곳이다. 크렘린 내부의 우스펜스키 대성당도, 지금은 사라진 옛 우스펜스키 수녀원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해체와 신축의 과정을 겪었다.    
 
뚤라의 크렘린 내부에 위치한 우스펜스키 대성당 또는 '축복 받은 성모 마리아 영면 대성당'(1766년)과 종탑의 모습. 종탑은 1936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복원됐다. 사진/필자 제공
 
크렘린 주위에는 널찍한 공원이 있는데, 그것이 처음 정원으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대해 올가 선생님이 설명해 준다. “17~19세기 초에는 배가 다니는 강물이 크렘린의 벽까지 가닿곤 했습니다. 1830년대에 크렘린 주변에 정원이 구획됐는데, 당시 정원에 들어갈 때 여성은 무료, 남성은 돈을 내야 했지요. 정원에서는 무도회와 음악회 등이 열렸습니다. 20세기 초까지 보트 선착장이 있었어요. 1917년 혁명 후에도 대중 행사들이 여기서 열렸고요. 1941년 전쟁이 나자 무기 공장이 이곳을 사용했는데, 두어 해 전 철거되고 공원이 됐지요.” 2017년까지 무기 공장의 저장 구역이었던 우파강 옆 까잔스까야 제방은 2018년 대규모 공원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뚤라의 크렘린 옆에 있는 우파강의 까잔스까야 제방이 2017~2018년 공사 후 대규모 공원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사진/필자 제공
 
크렘린에서 이어지는 ‘울리짜 메딸리스또프’(금속노동자들의 거리)는 노조가 있었던 곳이라 그렇게 불리지만 옛 이름은 ‘뺘뜨니츠까야’였다. 최근에 복원된 빠라스케바 뺘뜨니짜 예배당의 이름을 따 붙여졌던 것이다. 이 역사적 거리는 상인들이 살던 부자 동네로 나무집은 한 채도 없이 모두 벽돌집이었으며 매년 수리를 했다고 한다. “밤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유일한 거리였어요.” 올가 선생님이 덧붙였다. 한편, 톨스토이 시대에 끼옙스까야 거리(현 레닌대로)와 베르흐네-드바랸스까야(‘위쪽 귀족’, 현 고골 거리)의 모퉁이에는 자치 기구인 귀족 의회의 건물이 있었다. 1858년 뚤라 귀족 의회에서 ‘양심적인 금전적 보수’로 땅과 함께 농민을 해방하자는 안이 나왔을 때 총회 대표 약 25%의 귀족들이 서명했다. 톨스토이가 거기에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뚤라의 거리 이름에 ‘위쪽 귀족 거리’, ‘아래쪽 귀족 거리’가 있던 시절, 그 거리들을 톨스토이는 숱하게 걸었을 것이다.
 
뚤라의 역사적 공간인 '뺘뜨니츠까야'(현 메딸리스또프) 거리는 톨스토이 시대의 상인들이 살던 부자 동네로, 2019년 방문 당시 옛 주택들의 개축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진/필자 제공
 
<전쟁과 평화>의 탄생지 야쓰나야 빨랴나 
 
뚤라에서 버스를 타고 야쓰나야 빨랴나의 톨스토이 집-박물관에 도착하니, 올가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박물관의 견학 안내자 알렉산드르 물랴르 씨가 미리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야쓰나야 빨랴나 목요회와 박물관의 협력 관계 덕분에 나는 알렉산드르 씨의 상세하고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며 견학하는 행운을 누렸다. 야쓰나야 빨랴나는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그가 82년의 생애 중 약 50년을 보낸 공간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부활>을 비롯해 많은 작품들이 여기서 집필됐다. “사회에서 톨스토이의 권위가 매우 컸기 때문에 당대 러시아 문화계의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기 위해 야쓰나야 빨랴나로 찾아왔고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톨스토이와 교류한 화가, 작가들로는 레핀, 크람스코이, 뚜르게네프, 고리키, 체홉 등이 있다.
 
야쓰나야 빨랴나 톨스토이 박물관의 견학 안내자인 알렉산드르 물랴르 씨가 '톨스토이의 집'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는 촬영 금지다. 사진/필자 제공
 
톨스토이 어머니의 친가가 발콘스키고 외가가 트루베츠코이여서 그는 이 두 가문 출신의 데카브리스트들과 친척 관계다. 야쓰나야 빨랴나의 부지 일부를 처음 사들인 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외증조부인 발콘스키인데, 그 후 영지로서 모습을 갖춘 사람은 장군이었던 외조부 니콜라이 발콘스키 대공이다. 그는 부지를 계속 사 모아 공원, 정원, 오솔길, 연못, 온실, 마구간, 그리고 3층짜리 커다란 중앙 저택(본채)과 두 개의 별채를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들을 만드는 동안 그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 현재 ‘발콘스키의 집’으로 불리는 저택으로, 야쓰나야 빨랴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가 본채의 1층만 완성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외동딸인 마리야(톨스토이의 어머니)가 이 영지를 물려받았고, 톨스토이 부모의 사후, 1847년 유산 분배 당시 슬라브 풍습에 따라 5남매 중 막내아들인 19세의 레프 톨스토이가 야쓰나야 빨랴나를 상속하게 된다.
 
뚤라 도서관 시스템(도서관 및 정보 콤플렉스) 내 전시물. 레핀이 그린 톨스토이의 초상화(1887년) 인쇄본 옆에, '나의 야쓰나야 빨랴나 없이는 러시아와 그에 대한 나의 관계를 표상하기 어렵다'라는 톨스토이의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필자 제공
 
아쉽게도 톨스토이가 태어난 본채는 남아 있지 않다. ‘톨스토이의 집’은 그가 두 별채 중 하나를 확장해 가족과 살았던 건물이다. 그 속사정은 이렇다. 톨스토이가 군복무를 할 당시 군인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자 야쓰나야 빨랴나의 관리인에게 집을 팔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집은 팔렸지만 잡지 발행은 허가를 받지 못하고 만다. 톨스토이는 본채를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집은 사라졌고 결국 확장된 별채가 그의 집이 됐다. 집 내부에는 그가 작품을 쓰던 책상을 비롯해 대문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야쓰나야 빨랴나를 45일 동안 점령했지만 박물관 소장품들은 잘 대피시켜졌다가 돌아왔다.
 
1949년 12월에 개관된 뚤라의 톨스토이 시립중앙도서관 내부.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1978년 이 도서관에 ‘톨스토이’의 이름이 부여됐다. 사진/필자 제공
 
톨스토이의 원칙
 
톨스토이는 1859~1862년 야쓰나야 빨랴나의 쿠즈민스키 별채에서 농부들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톨스토이 교육의 두 가지 원칙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였습니다.” 안내하는 알렉산드르 씨의 말이다. 외국인과 교류할 일이 없으니 농민의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과목은 외국어가 아니라 러시아어, 러시아 역사, 법, 생물, 지리, 경작이었고(‘무엇’), 그것들을 재미있게(‘어떻게’) 그리고 처벌 없이 가르치는 게 중요했다. 톨스토이는 학교의 모든 규제와 규율에 반대했다. “학교에 오고 안 오는 것도 자유로웠습니다. 학생에게는 쉽고 교사에게는 어렵게 하는 것이 그의 교육 원칙이었어요.”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소박한 무덤. 묘비도 십자가도 없다. 사진/필자 제공
 
톨스토이는 농민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는 하루 평균 20통 가량의 편지를 받았는데, 지식인들의 편지보다 농부들의 단순한 편지를 선호했다고 한다. 철학이나 종교를 논하는 지식인들의 편지가 종종 자기애를 충족시키려는 느낌을 주는 데 비해, 그에게 돈을 달라거나 조언을 구하면서 도움을 청하는(글을 쓸 줄 아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편지는 솔직하고 답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다.
 
야쓰나야 빨랴나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밝은 숲 사이의 빈터’가 된다. 그런데 물푸레나무들이 양쪽에 늘어선 오솔길을 걸을 때 알렉산드르 씨는 다른 가설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곳에 물푸레나무(야쎈)가 많아서 ‘야쓰네바야(야쎈이 많은) 빨랴나(숲 사이의 빈터, 오솔길)’에서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무덤을 마주해 보니 그의 정신이 물푸레나무의 자연과 닮아 있고 세상에 환하게 빛남을 느낀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묻고 대답하던 그의 소박한 삶의 방식이 묘비 없는 무덤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야쓰나야 빨랴나 톨스토이 박물관의 '큰 연못'에서 톨스토이의 흔적을 찾는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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