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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규

(토마토칼럼)그저 편히 밥 한 끼 먹을 권리

2021-08-27 06:00

조회수 : 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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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밤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 아파트 단지 내에 택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틀 전 주문한 물건이 집 앞에 놓여 있겠다는 반가움과 함께 불이 켜진 운전석이 눈에 들어왔다. 택배기사가 스마트폰을 만지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아마 김밥 한 줄로 저녁을 해결하는 듯했다.
 
이미 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에 여럿 있다. 당연히 낯설지 않아야 할, 그리고 잠시 스쳐 지나는 게 보통이던 일이지만 이날만큼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목격한 듯 긴 여운이 남았다.
 
이보다 몇 주 전 동네 분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때의 일도 떠올랐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다.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식당 주인에게 열무냉면 가격을 물었다. 7000원이란 대답을 듣고 잠시 머뭇거린 후 비빔냉면은 얼마냐고 했다. 답은 6500원이었다. 두 메뉴의 가격을 확인하듯 되묻고 지갑을 열어 1000원짜리를 꺼내 헤아렸다. 할머니가 손에 쥔 돈은 7000~8000원쯤 됐다. 서너번 같은 일을 반복하고 "미안한데 떡라면 주세요"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주문했다. 냉면보다 2000~3000원 정도 싼 메뉴다. 할머니는 그 뒤로도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무더운 날씨에 시원한 냉면을 먹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쉬워 보였다.
 
특별히 비싸거나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닌 김밥 한 줄, 냉면 한 그릇은 누구나 원할 때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을까.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폐허가 된 상황도 아니고 나라 전체가 찢어질 듯 가난해 졸음을 물리치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시대도 아닌데.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불현듯 떠오른 막연한 고민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기본소득 생각이 났다. 기본소득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해법에 가까워 보인 것은 소득과 재산에 상관없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통상의 지원책처럼 수입이나 재산을 기준으로 한다면 눈뜬 시간 전부를 쏟은 대가로 빈곤에 빠지지 않는 택배기사, 집은 있지만 현금이 부족한 노인은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기본소득을 곱지 않게 보는 쪽에서는 재정에 문제가 생겨 국가가 부도 상황에 몰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달 용돈도 안 되는 기본소득을 준다고 국민의 삶이 나아지겠냐고도 한다.
 
국가 부도는 개인의 재산을 불리거나 지인의 이권을 챙겨주는 데만 몰두하는 정치 지도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나 해야 할 걱정이다. 지역화폐로 골목상권에 돈이 돌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악영향만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한 달에 10만원도 안 되는 돈이 하찮을 수도 있다. 아마 수억원의 연봉을 받거나 나라에서 준 차에 나랏돈으로 기름을 넣고 고급식당에서 한 끼에 몇만원, 십수만원을 쓰는 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택배기사에게는 물건 100여개를 덜 날라도 되는 돈이다. 한 달 중 하루는 서너시간의 휴식을 취하거나 한 달 내내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정도의 여유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무더위를 조금이라도 씻는 데 도움이 될 냉면을 아무 걱정 없이 10번 이상 먹어도 된다.
 
기본소득이 수십~수백만원이라면 많은 사람이 생계 걱정을 덜게 되고 조급함에 입사했다가 사표를 내고 새로운 일자리 찾기를 반복하는 젊은이도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런 날이 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다. 그저 누구나 편히 앉아 밥 한 끼 먹을 정도면 충분히 의미 있다.
 
 
전보규 기자 jbk880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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