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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노무현이 그립다

2022-05-1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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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5월29일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국정치의 고질병은 지역주의였다. 시작은 71년 대선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의 약진을 뿌리치기 위해 지역주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대중에게는 '호남'과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졌고, 호남은 한국에서 고립되는 '섬'이 됐다. 사실 이전만 해도 호남은 박정희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고, 권력 공백의 틈을 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부독재를 연장한 전두환은 노골적으로 지역주의를 부추겼다. 87년 들끓는 민주화 요구 끝에 직선제 개헌을 얻어냈지만 이는 지역대결을 이 땅에 뿌리 박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양김으로 불렸던 YS와 DJ는 끝내 갈라섰고 영·호남은 분열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2002년 16대 대선에서 지역주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을 낸 인물은 노무현이었다.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영남의 단결된 지역주의를 TK와 PK로 분리시켰다. 그렇게 부마항쟁의 중심이자 야도 부산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는 DJ의 동진정책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부산 출신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노무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역주의를 끝장낼 선거제도 개혁을 고리로 대연정을 제시했다.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물론 여당인 열린우리당(현 민주당)마저 반대하며 무산됐다.
 
점차 완화되던 지역주의는 21대 총선에서 부활했다. 민주당이 180석을 얻었다고 환호했던 이면에는 영남의 지역 결집이 있었다. 문재인정부에 대한 견제 표현이기도 했지만, 바탕은 지역주의였다.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은 이를 경계하지 않았다. 대선에 지방선거, 총선까지 내리 압승했다는 승리감에 젖어 이를 유심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자만과 오만으로 일관했다. 50년 집권론까지 나왔다. 결과는 참혹했다. 97년 15대 대선 이후 지속되던 10년 정권교체 주기설을 깨고 처음으로 5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 치고는 초라한 몰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지역대결에 더해 세대별, 성별 갈등도 극심해졌다는 데 있다. 김종인의 노회한 전략만을 배운 이준석은 이른바 세대포위론을 꺼내들었다. 기존 60대 이상의 절대적 지지에 2030 청년세대의 문재인정부에 대한 반감을 묶어 민주당 지지 기반인 4050을 포기하겠다는 대전략이었다. 이는 젠더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대남(20대 남성)을 잡기 위해 남성 위주의 정책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병사 월급 200만원 인상 공약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보다 못한 2030 여성들이 이재명으로 결집했다. 이재명도 당초에는 이대남 표심에 기웃거렸다. 윤석열과 이준석의 선점으로 선택지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정확히 둘로 쪼개졌다.
 
각각 분리된 지역과 세대, 젠더는 진영이란 이름의 대집단에 다시 뭉쳤다. 이에 대한 무한책임이 있는 윤석열은 대통령이 됐다. 상투적으로 쓸 법한 '국민통합'이란 단어조차 취임사에 담지 않았다. 대신 '자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준석은 역대 최연소 집권여당 대표로 위상을 달리 했고, 앞선 두 사람과 함께 결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재명은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또 다시 진영대결에 기대고 있다. 이 상태로는 누가 집권해도 나라가 온전치 못하게 된다. 대립과 분열, 갈등의 연속일 뿐이다. 그 사이를 이명박 사례처럼 '이해'가 비집고 들어서면 미래조차 갉아먹게 된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그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적어도 국가를 걱정하며 정치를 했다.  
 
정치부장 김기성 kisung012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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