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최한영

(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용기있는 여성이 여성인권 바꿀 수 있어

2017-07-04 06:00

조회수 : 5,514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2000년대 들어 독일, 핀란드, 칠레 등에서 여성 국가수반이 등장하는 돌풍이 불었다. 이때 프랑스 사람들은 “왜 우리는 여성 대통령이 없는가”라고 자문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7년 대선을 맞아 프랑스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들은 여성인 세골렌 르와얄 전 환경부 장관을 지목했고 사회당(PS) 대선 후보로 등장시켰다. 그러나 르와얄 후보가 정작 대선에서 우파인 대중운동 연합당(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와 적수로 맞붙었을 때 많은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에 여성 대통령 감이 있다면 그것은 시몬 베이유(Simone Veil)다”라는 말을 했다.
 
프랑스인들이 대통령 감이라고 보았던 베이유 여사가 지난 주 향년 89세로 영면했다. AFP 통신은 여성 인권사의 큰 인물이 생을 마감했다고 보도했고 프랑스·유럽의회 의원과 지식인들, 유명 연예인들, 익명의 수많은 여성들과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그녀를 향해 “감사(merci)”의 뜻을 전하며 애도했다.
 
왜 프랑스는 베이유 여사의 죽음 앞에 만장일치로 감사를 표하는가. 베이유는 일명 ‘베이유 법’이라 불리는 임신중절 법을 만든 장본인으로 이를 통해 프랑스 여성인권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무소속인 46세 법률가 베이유는 1974년 5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에 의해 보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그녀는 프랑스 여성해방을 위해 임신중절 법을 만드는데 사활을 걸었다. 국회에서 베이유 장관이 ‘임신중절’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일부 의원들은 신랄한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베이유 장관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저는 먼저 여러분(남성 의원들)이 여성의 진지함을 함께 공유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남성으로 도배된 이 의회에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떤 여성도 낙태를 기꺼이 사용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 당시 낙태 반대론자들의 반격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엑토르 롤랑 의원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베이유 장관을 빗대 “집단을 말살하는 하나의 선택”이라 했고, 장 마리 다이에 의원은 “화장터에 던져진 태아를 연상시킨다”고 했으며, 자크 메드생 의원은 “독일 나치가 조직적으로 했던 만행과 같다”고까지 했다.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모욕적인 발언들이었지만 베이유 장관은 여성정치인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설득했다. 1974년 11월29일 한 밤 중 임신중절 법은 표결에 부쳐졌고, 284명의 찬성과 189명의 반대로 가결되었다. 프랑스 여성인권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결투는 베이유 여사의 정치적 커리어를 높이는데 공헌했고 1979년 유럽의회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는 발판이 되었다. 1993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수상이 보건·도시·사회문제 담당장관으로 임명할 때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유럽의회 의원으로 유럽통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소신 있게 행동한 베이유 여사는 프랑스 공화국의 역사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오랫동안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그녀를 “프랑스인의 귀감이 되었고 프랑스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극찬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도 “프랑스는 거목을 잃었고 베이유는 역사의 산 증인으로 역사를 만들었다”고 애도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 또한 “베이유는 불멸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베이유 여사의 장례식은 오는 5일 엥발리드 무명용사 묘지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지게 된다. 엘리제궁 측은 “이 공식 장례식에는 각계 인사들이 초대되고 엥발리드에는 슬픔에 잠긴 프랑스 국기와 유럽기가 반기로 게양될 것”이라고 밝혔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베이유 여사가 프랑스 여성인권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여성의 문제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려는 투혼에서 비롯되었다. 한국도 이렇듯 투혼이 강한 여성 정치인들이 나와 여성인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 여성의 지위와 인권의 현주소는 후진국 중에 후진국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임금격차, 불평등 지수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상태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 격차지수는 0.649로 조사대상 144개국 중 116위를 기록했다. 이런 부끄러운 환경 속에서 양성평등을 운운하고 저출산 대책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이다.
 
촛불로 이뤄낸 이번 정부에서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를 현대화해야 한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여성에게 우호적인 정부에서 여성 정치인들은 한국 여성인권을 향상시킬 절호의 찬스를 잡아야 한다. 한국이 진정한 남녀평등 사회로 나아가려면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 여성들 스스로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베이유 여사가 마초들이 판을 치는 국회에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용감히 맞섰듯이 한국의 여성 정치인들도 용감하게 결투를 벌여야 여권은 신장된다. 용기와 투지를 가진 자만이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정부에서 여성의 인권사를 바꿀 멋진 여성 정치인이 한 명이라도 등장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 최한영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