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태생입니다. 운동권이란 단어와는 사실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세대입니다.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나는 저의 친 누님과 형님들이 딱 저 운동권 세대입니다. 실제로 저의 큰 누님은 과거 여성 운동권 단체에서 일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반면 구순에 가까운 아버지는 그 시절 아버지 세대 그대로입니다. 군사 정권 시절의 서슬 퍼런 집권을 서민들의 생활 안정이란 명분으로 지지하셨습니다. 집안에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 아버지와 큰 누나의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전 그 시절 ‘운동’이란 단어가 유치원에서 봄 가을이면 하는 운동회의 운동인줄 알았습니다. 당시 유치원생이던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운동을 정말 싫어하는 구나.”
대학 시절은 무난했습니다. 조금은 특별한 대학을 다녔기에 그 시절에도 운동과는 무관했습니다. 고교 시절 친구들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과격한(저희 세대에서 나름의) 운동권 이기도 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저의 무관심에 ‘노동자의 외침’과 ‘기득권 세력’의 불합리성을 일장 연설하면서 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마 기억으론 그 시절이었습니다. 관심이라기 보단 어떤 흥미가 생겼습니다. 저희 큰 누님과 형님 방에서 언뜻 본 기억이 났습니다. ‘장산곶매’ 란 영화집단. 1990년대 후반 한국 상업 영화계를 주름 잡은 영화인들의 산실이 된 곳입니다. 일종의 영화 동아리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포털사이트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 집단의 영화 ‘오! 꿈의 나라’ 그리고 ‘파업전야’, 한국 노동 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두 작품입니다. 국내 스크린 상영 없이 해적판 상영으로 당시 무려 30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았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산입니다. 일부에선 100만이 넘는 관객들이 본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1000만이 훌쩍 넘는 수치입니다.
대학 시청각자료실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지금과는 다른 필름의 거친 질감 그리고 낯선 배우들의 연기. 영화란 매체의 기본 선입견인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이라기 보단 어떤 사건을 두고 그 사건 자체에 오롯이 집중한 일종의 리얼리즘 형식의 비주얼이 기억에 납니다. 정확하게는 언제인지 기억이 없지만 21년 전 본 기억이 납니다. 군입대 전 학교에서 관람을 했습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게 정말 영화라고?”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또렷합니다. 디지털이 영화 상영의 기본이 된 지금과 달리 1990년대에는 필름이 주축이었습니다. 필름의 질감이 주는 현실성과 관점의 주관성이 더욱 도드라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두 편은 저에겐 무소불위의 현실적 타격감을 안겨줬던 영화입니다.
기억 속에서 아련합니다. 이 영화가 당시 왜 극장에서 상영이 불가능했는지. ‘장산곶매’에 소속된 영화인들이 왜 공권력에 탄압을 받았는지는 그들의 영화를 보면 완벽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대표작이기도 한 ‘파업전야’가 최근 디지털4K 리마스터링(쉽게 말하면 화질을 깨끗하게 하는 작업) 버전으로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장산곶매’의 일원이던 이은 명필름 대표가 큰 힘을 쏟은 것 같습니다. 국내 노동 영화의 전설로 불린 이 작품을 꼭 한 번 보시길 권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