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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설날에도 박스가 돈다

오늘 부는 바람은

2015-02-2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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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시기’를 보내는 곳이 고향이다. 결정적 시기에 사람의 뇌는, 주무르는 대로 모양이 변하는 찰흙과 같다는 게 교육심리학의 설명이다. 보고 듣는 대로 그 모양새를 바꾼다. 즉, 그때 사람은 제 감정의 밑그림을 그린다. 채색의 틀이 밑그림이듯, 기뻐 웃거나 슬퍼 우는 이유가 서로 다름은, 결정적 시기를 나름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지금 선 곳에서의 웃음과 울음의 뿌리를 캐다 보면 고향에 선 자신을 본다.
  
오늘, 사람들은 고향에 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소의 몇 곱절이 되었다니, 아주 먼 길이었을 게다.
 
나는 왕십리로 돌아왔다. 5년 전에 대학 새내기가 되어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 고향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장 편하다. 서울에서의 첫해를 여기서 보내고 신촌, 군대, 상암을 옮겨 다니다 오 년 만에 돌아왔다. 방은 좀 넓어졌고, 학교 가는 길은 좀 늘어났다. 조용히 혼자 쉬고 싶었다. 이삿짐 정리 등의 핑계를 대고, 이번 설은 혼자 쇠기로 했다.
 
이삿짐을 정리할수록 박스가 쌓인다. 전에 살던 데서 가져온 박스 위에, 새로 산 가재도구를 포장한 박스도 있다. 짐 싸던 날, 박스를 주워 모으느라 새벽 어스름에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금방 모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경쟁을 맞닥뜨렸다. 매일 같이 이 시간에 박스를 찾아 상암 일대를 도는 늙으신네가 있었던 거다. 나를 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애면글면 구한 박스에 짐을 욱여넣었다. 용달차 모는 아저씨를 불렀는데, 박스를 싣고 상암에서 왕십리로 옮기는 데 7만 원씩이나 했다. 요즘 일거리가 잘 없다고 한다. 인터넷에 전화번호를 띄워야 가까스로 일을 잡는다고도 했다. 그 ‘번호값’이 얼만지(10만 원 예상하고), 여쭈었다. “매달 35만 원, 요새는 머리 좋은 놈한테 다 뜯겨요.” 7만 원씩이나 드렸는데, 아저씨는 7만 원밖에 못 받은 거다.
 
늙으신네가 주우려던 박스를, 용달차 모는 아저씨가 옮겼다. 이제 쓸모없는 그 박스를 밖에 내놓으려다가 1층까지만 내려놓았다. 다 노는 설이라 주워갈 사람도 없지 싶었고, 궂은 날씨에 비에 젖으면 주워가지도 않을까봐. 설 쇠고 내놓기로 하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근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그 박스들이 죄다 사라지고 없다.
 
상암의 그 늙으신네가 왕십리까지 올 리는 없고, 여기에도 만날 박스를 줍는 또다른 늙으신네가 있는 거다. 말 그대로 만날, 명절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에 뜬, 용달차 모는 아저씨의 전화번호 또한 ‘연결 가능’이다. 오늘도 용달차가 박스를 옮기고 늙으신네는 줍는다. 누구에게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오늘은 그 마음대로, 모두가 고향을 찾는 날인데, 박스가 돈다.
 
◇사진=바람아시아
 
서종민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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