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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열

(차별받지 않을 권리①)트랜스젠더 인권 높이라는데…정신장애 취급하는 정부

인권위 "트랜스젠더 실태조사 통계 만들라" 권고

2022-07-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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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가 사각지대에 놓였다. 이들에 대한 정부의 실태 조사 통계는 고사하고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정신장애로 분류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태 조사 통계를 만들 것을 관계 부처에 권고했지만, 이를 받아들인 기관은 없다. 정부가 트랜스젠더의 인권 제고에 손을 놓는 사이 이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과 비난은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생존마저 위협받는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서둘러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편집자주)
 
관련 정부 부처들이 최근 트랜스젠더에 관한 통계를 신설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회신한 것으로 확인됐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부가 이에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25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여성가족부와 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통계청·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등은 인권위 권고를 사실상 거부하거나 일부만을 소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인권위에 회신했다.
 
 
거부 사유도 가지가지다. 여가부 관계자는 “통계를 만들려면 모집단에서 표본을 추출해야 하는데, 트랜스젠더의 표본이 매우 적다”며 “표본이 대표성을 띠기 어렵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행안부 역시 주민등록인구 실태조사시 성별정체성 항목을 신설하라는 인권위 권고에 “수용하기 곤란하다”며 거부하는 내용으로 회신했다. 주민이 성별정체성을 자의로 신고할 경우, 주민 성별 정보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행안부 입장이다. 현행 주민등록법은 주민이 신고한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신고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주민 신고 내용은 등·초본 등 공적 정보로 쓰인다.
 
복지부는 타 기관의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를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트랜스젠더 관련 통계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통계청 정도가 5년 단위로 시행하는 2025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 트랜스젠더 실태를 조사할 통계를 신설할지 검토 중이다. 신설 여부는 오는 2024년 하반기에나 확정될 예정이다. 통계청은 다만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조사항목은 응답거부가 증가하고 있고 사회적 합의나 현장조사 가능성 등을 고려해 신중히 접근하고 있다”며 인권위 권고 수용 여부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총리실은 통계 신설 여부는 통계 작성 기관의 영역이라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추후 각 부처 사이에 조정할 사안이 생길 경우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인권위는 지난 3월16일 행안부·복지부·여가부·통계청 등에게 “각 기관에서 수행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관련 조사항목 신설 등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총리실에도 “통계작성 기관의 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서 성소수자 통계를 파악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관련 지침을 마련하라”고 권고문을 보냈다. 
 
현재 이들 기관의 통계에서 트랜스젠더 관련 조사항목은 없다. 이런 탓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집단이 정책 수립을 위한 인구집단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게 인권위 지적이다. 결국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에 관한 사안을 공론화하거나 분석할 수 없고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인권위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장애로 분류한 통계청의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도 문제라고 보고 있다. 현재 통계청이 시행 중인 8차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서는, 태어난 성별과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이 서로 다른 성별불일치감을 정신장애로 간주해 질병진단코드를 부여하고 있다. 8차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1990년 발표한 10차 국제질병분류(ICD-10)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ICD-10는 트랜스젠더를 성주체성장애로 분류했다. 
 
국제질병분류는 최근 11차(ICD-11)로 개편돼 올해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ICD-11에서는 성별불일치감이 정신장애가 아닌 ‘성적 건강 관련 상태’라는 범주로 분류됐다. 트랜스젠더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규정한 것이다.
 
WHO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며 그러한 정의(정신장애로 분류하는 일)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엄청난 사회적 낙인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통계청은 ICD-11에 기반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새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 예정 시점은 2031년이다. ICD-11가 이전보다 크게 바뀌면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역시 큰 폭으로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이는 만큼 준비할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분류상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공식발표가 있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더 걸리는 셈이다.
 
정부당국이 인권위 권고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는 사이,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적 혐오와 차별은 좀처럼 줄어들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종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인권이 보장받으려면 이들이 동등한 인격체라고 인식돼야 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정책이 나와야 하는데, 통계조차 제대로 잡지 않으며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성소수자 인권 제고를 정부가 선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1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대형 무지개 깃발을 펼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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