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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진

dawnj789@etomato.com@etomato.c

안녕하세요 이효진 기자입니다.
겁쟁이의 8천만원

2024-06-1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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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비율이 90%를 넘는 '깡통주택' 5곳 중 1곳은 보증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사진=연합뉴스)
 
빚이 있습니다. 8천만원 전세대출입니다. 몇 년 전 중소기업청년전세대출을 받았거든요. 서울에서 자취생이 제일 많다는 동네에 터를 잡았습니다. 1층에 4평. 작은 원룸에 햇살도 잘 들어오진 않지만, 다달이 나가는 돈이 크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 됐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겐 굉장히 큰돈을 빌려 들어오다 보니 그동안 살던 월세방들과는 다르게 ‘내 집’이라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집이 좁은 것도 오히려 안락하게 느껴지고, 1층이라서 바깥을 오가기 쉽고, 창문이 두 개여서 환기가 잘 되는 것도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광명 이케아까지 가서 흰 커튼과 꼬마전구를 사고 집을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행복은 1년이 채 가지 않았습니다. 치솟던 집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자 여기저기서 전세사기가 터졌습니다. 서울 곳곳에서 빌라왕들이 나왔습니다. 보증금을 못 돌려받아 하염없이 기다리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도 중국인이 대량으로 빌라를 구매해 전세사기를 벌인 것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안락했던 집이 어느새 모래성을 쌓아놓은 듯 불안해졌습니다. 순식간에 8천만원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겁쟁이가 됐습니다. ‘내가 나갈 때 다음 사람이 안 들어와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당장 사기를 당한 게 아닌데도요. 등기부등본을 주기적으로 발급받고, 집 위험도를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을 수시로 들어가 살펴보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안락했던 집은 좁아터진 집으로, 바깥을 오가기 쉬운 1층은 범죄에 취약한 약점으로, 두 개의 창문은 바깥의 담배 냄새가 더 잘 들어오는 요인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월세를 알아보기엔 다달이 월급에서 나가는 금액이 감당되지 않아 재계약을 선택했습니다. 겁쟁이의 삶이 2년 연장된 겁니다.
 
2022년 기준으로 임대사업자 보증보험 가입 주택이 총 70만9천26세대인데 이중 54%인 38만2천991세대는 집주인의 부채비율이 80%를 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전세사기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거부권 이후로 뾰족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8천만원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데 말이죠. 전세금에 행복을 저당 잡힌 겁쟁이들의 시련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효진 기자 dawnj789@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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