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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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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온기 느끼는' 피노키오, 내가 계속 죽는 이유

2023-09-20 16:10

조회수 :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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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 게이머들이 연일 꼭두각시 인형 이야기로 달아올랐습니다. 네오위즈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가 만든 피노키오 잔혹동화 'P의 거짓'은 출시 이틀째인 20일 PC 게임 플랫폼 스팀에서 한국 판매 1위, 세계 판매 6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일 스팀에 기록된 한국 내 최고 매출 게임은 네오위즈 'P의 거짓'이다. 이 작품 세계 판매 순위는 6위다. (사진=스팀 화면)
 
대체 이게 뭐라고 사람들이 수많은 평가를 주고 받으며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게임은 한국에서 귀중한 패키지 게임입니다. PC나 콘솔에 완성된 게임을 설치해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세밀히 깎고 다듬어 만든 서사에, 세계관을 깊이 있게 표현해 줄 각종 상호 작용 요소, 단어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대사까지. 확률형 아이템 장사로 얼룩진 온라인 게임 천국인 한국에서 이런 요건을 갖춘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입니다.
 
둘째로 장르의 특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라운드8 스튜디오는 이 작품을 '소울라이크' 장르라고 강조해왔고, 초보자들이 P의 거짓을 통해 소울 게임에 입문하기를 바랍니다. 소울라이크란, 일본 프롬소프트웨어에서 만든 '데몬 소울'과 '다크소울' 3부작, '세키로'와 '엘든링' 등 소울 시리즈로 불리는 게임의 특성을 계승한 작품을 일컫습니다.
 
소울의 특징은 현실적이어서 어려운 전투, 반복된 죽음을 통한 실력 향상, 마침내 어려운 적을 쓰러뜨렸을 때 오는 쾌감입니다.
 
그간 많은 아류작이 나왔지만 프롬 게임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는 게 이 장르를 좋아하는 게이머들 이야깁니다.
 
P의 거짓은 이야기를 유추해야 하는 소울 시리즈와 달리 동화 '피노키오' 잔혹극이라는 점에서 이 장르 입문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다크소울 1편 리마스터를 해 보려다, 불편한 조작감에 설명도 부족해서 이야기를 진행할 동기가 없었습니다. 대중성을 가미해 2000만장 팔린 엘든링 역시 별다른 동기를 느끼지 못했지요.
 
지난 16일, 언론사 리뷰용 정식판 시작 81시간 30분만에 중간 보스 '인형의 왕 로미오'를 쓰러뜨린 모습.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반면 P의 거짓은 피노키오 이야기가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 궁금해서라도 죽고 또 죽으며 재도전을 반복하는 중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 파훼한 '인형의 왕 로미오'가 대표적인데요. 언론사 리뷰용 정식판 시작하고 로미오를 무찌르기까지 81시간30분이 걸렸습니다. 전투는 대형 로봇 '인형의 왕'을 해치우면 그 안에 타고 있던 로미오가 나와서 2차전을 시작하는 구조입니다. 로미오에게 죽으면 1회전부터 다시 하는 일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하지요. 
 
그래도 저는 포기 안했습니다. 인형의 왕이 피노키오를 만나 보여준 연극의 의미가 무엇인지, 피노키오는 앞으로 어떻게 인간이 되는지, 그가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수많은 선택지는 어떻게 주어지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되지 않냐고요? 다른 게임이면 몰라도 P의 거짓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막히는 부분에 대한 공략 영상은 보고 있지만, 이후 이야기는 제가 직접 상호작용하며 진행하고 싶거든요.
 
무엇보다 피노키오가 인간성을 얻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기 때문에 이 상황을 제가 직접 판단하며 지켜보고 싶습니다. 게임 속 피노키오는 처음 거짓말 할 때 '태엽이 반응한다'는 안내문이 뜹니다. 나중엔 인간성을 얻었다는 안내문이 '에르고가 속삭인다'로 바뀌고, 이후엔 '온기가 느껴진다'로 발전합니다. 처음엔 P에게 적대적이던 크라트 호텔의 고양이도, 에르고의 속삭임을 듣고 온기를 느끼는 P의 손길에 몸을 맡깁니다.
 
크라트 호텔에서 무기 성능을 높여주는 한국인 기술자 유제니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 '온기'를 느끼게 된다. 피노키오는 처음 인간성을 얻을 때 태엽이 반응하지만, 나중에 에르고의 속삭임을 듣고, 다음으로 온기를 느낀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게임 내 중요한 상호작용 장치인 에르고 해석에 대한 재미도 큽니다. 에르고에 관한 저의 해석은 제가 쓴 기사 ''코기토' 향한 P의 여정, 에르고 품고 달린다'에서 읽으실 수 있는데요. 게임 속 P와 다른 자동인형의 동력원인 에르고가 철학자 데카르트 명제인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가져왔다는 해석입니다. P의 거짓말이 이야기의 접속사인 에르고(그러므로)이기도 하고, 에르고라는 단어 자체에 이성 활동과 추론 활동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P가 이성활동인 거짓말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면서 끝내 사유 주체인 코기토가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제가 어제까지 진행한 내용에 따르면, 기사 속 해석이 작품 내 에르고에 대한 설정과 점점 부합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최근 유튜브 '풍월량' P의 거짓 실황 중계 방송에서도 등장인물의 에르고 설명을 들은 시청자가 '코기토 에르고 숨'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본 공략에 따르면, 저는 잘못된 판단을 많이 내렸습니다. 아이템 사용과 상대방에 대한 대답, 누군가를 어떻게 도와야 할 지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요. 하나의 P를 깨웠다면 그 P에 대한 저장과 불러오기를 따로 못한다는 점도 우리의 인생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P의 거짓 결말을 향해 죽고 또 죽으며 나아가려 합니다. 소울 게임 고인물인 '망자'들도 어렵다고들 하는 게임이지만, 한국산 패키지 게임이 가진 서사의 힘을 온전히 느낄 기회는 소중합니다. P의 거짓 결말을 보고난 뒤엔 어쩌면 소울 자체에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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