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진짜'는 판별이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품은 돈만 많이 들이면 과학 기술을 통해 가려낸다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확인할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탄소 감축' '동반 성장' '지역 상생' 등 주변을 맴도는 구호를 그냥 믿으면 될까요. 그러기엔 뒤통수가 시립니다.
ESG 선도 기업인 블랙록 역시 '가짜'로 판명난 적 있습니다. 블랙록은 투자 결정 시 환경 지속성을 핵심 목표로 삼고, 수익의 25% 이상이 석탄산업에서 발생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이 약속은 거짓이었습니다. 환경단체인 리클레임 파이낸스와 우르게발트 등의 조사 결과, 석탄회사에 지속해서 투자하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세계 최대 탄광업체 주식과 채권도 팔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속 가능 기업에 투자하는 자산은 전체 상장지수펀드(ETF)의 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친환경 행보를 믿었던 많은 환경보호 단체들은 발등이 찍히고 말았습니다.
말로만 녹색경영을 외치는 '언행 불일치'.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요. 일반 소비자가 이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스코프 단계'입니다. 탄소를 어느 범위까지 줄이겠다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탄소 배출은 배출원에 따라 크게 스코프 1, 2, 3 세 단계로 나뉘어 관리됩니다. 스코프 1은 사업장·공장·석유 정제설비 등에서 제품을 만들 때 직접 발생하는 탄소입니다. 스코프 2는 각 사업장 및 석유 정제설비 등에서 구매하는 전기를 만들기 위해 발생하는 간접 배출입니다. 스코프 3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의 물류·출장·공급망 및 제품 사용으로 인한 배출을 뜻합니다.
제조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 중 스코프 3 비중이 70~80%입니다. 압도적 비중을 차지합니다. 자체 발생에 해당하는 스코프 1, 2 비중은 20~30% 수준에 불과합니다. 즉, 탄소 배출 관리 대상을 스코프 3에 속하는 공급망까지 확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치사슬 전반에 대한 탄소 관리체계 구축이 필요합니다.
스코프는 한국에선 아직 낯선 개념입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선 ESG 공시에 스코프 3을 도입하는 것을 두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지난 4월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초안을 공개한 금융위원회가 기업, 투자자 등 이해관계자들로부터 구체적 의견을 들은 결과 공시 대상 범위와 관련해 어려움 호소가 많았습니다. 해외 자회사에 대한 기후 관련 신뢰성 있는 정보를 얻기 어렵고, 스코프 3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가 아직 세계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스코프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증권 거래 위원회(SEC)가 스코프 3을 기업 의무 공시 사항에서 제외하긴 했으나, 많은 소비자가 석유회사 등 기업의 탄소중립 계획 발표 시 스코프 3이 포함됐는지를 따집니다. 탄소 배출량을 탄소 집약도로 용어를 바꿔치기하지는 않았는지도 살핍니다.
블랙록 역시 스코프 단계에 의해 눈속임이 들통났습니다. 래리 핑크 회장이 분명 "기후 위기 대응이 미진한 기업에 대해 반대 표를 행사하고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그 기준은 스코프 1, 2단계에서 배출되는 탄소량이었던 것입니다. 스코프 3단계는 탄소 배출 정보 공개를 요청하는 정도로만 언급했습니다. 그 이상의 규제나 투자 지침은 없었습니다.
'스코프 단계'는 ESG 경영에 있어 '진짜'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입니다. '착한 기업' '따뜻한 기업' '일류 기업'은 ESG 경영을 선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성을 갖춰야 합니다. 진정성은 오랜 기간 반복되는 행동에서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결과물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소비자들은 금방 돌아섭니다. 다행히 국내 기업들은 '진짜' ESG 경영에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금융위에 의견을 제출한 기업 106곳 가운데 96곳이 기후 관련 사항을 먼저 의무 공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스코프 3을 포함한 ESG 공시는 이뤄질 것입니다. 그때 '진짜' ESG 기업으로 판별되고 싶나요. 지금이 탈바꿈할 기회입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월 열린 국내 ESG 공시기준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