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현장+)42년된 ‘을지OB베어’ 철거되던 날…골목의 역사가 지워졌다
최수영 사장 “그동안 순진했다. 이제 상생 힘들 것 같다”
강호신 사장 “괜찮다.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어서 무서울 게 없다”
입력 : 2022-04-21 23:32:56 수정 : 2022-04-22 15:42:22
 
 
[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어제까지만 해도 상생을 외쳤는데 아주 순진했습니다. 천지가 개벽해서 반전이 있지 않는 이상 이제 상생이라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들 어떠냐고 물으시는데 괜찮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도 무서울 게 없습니다.”
 
최수영 을지OB베어 사장이 가게가 강제철거된 2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 골목에서 열린 긴급 촛불기도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42년 된 가게를 하루아침에 빼앗긴 최수영, 강호신 ‘을지OB베어’ 사장은 21일 열린 긴급 촛불기도회에서 각각 이렇게 운을 뗐다. 이들 부부는 술 냄새 풀풀 나는 노가리 골목에서 간판조차 사라진 가게를 보며 애써 마이크를 잡았다.
 
최 사장은 “이제는 저부터 바꾸겠다”며 “일찍 나와서 만선호프의 불법적인 행위를 적발해 민원을 제기하는 것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동안 상생이라는 것을 같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 가게를 지키는 것이 책무라고 생각했다”며 “이제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반성하고 이제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강 사장은 “창업주인 아버지의 전 삶이 있던 곳을 오늘 아침 침탈당했다. 아버지의 삶이 없어진 것 같아 불효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며 “6평짜리 가게를 들어내겠다고 강제집행을 당했다. 그 뒤에는 돈과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투쟁을 예고했다. 강 사장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더 이상 노가리 골목이 아니다. 을지로 만선 노가리 골목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동요되지 말자”며 “다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2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소재 을지OB베어 메뉴판 사진. (사진=변소인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의 원조인 ‘을지OB베어’는 21일 새벽 결국 강제 철거당했다. 지난 2018년부터 가게를 비워달라는 건물주와 갈등을 겪어왔는데 결국 새벽에 기습 철거됐다. 이를 규탄하기 위해 이날 저녁 긴급 촛불기도회가 열렸고 1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촛불기도회는 매주 수요일 열렸지만 이날 가게가 강제 철거되면서 긴급하게 자리가 마련됐다. 을지OB베어 사장 부부와 촛불교회, 시민단체 등은 이번 주 내내 매일 촛불기도회를 열 예정이다.
 
2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에서 열린 을지OB베어 강제집행을 규탄하는 긴급 촛불기도회에 참석한 외국인이 다른 외국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만선호프가 ‘골목대장’이 된 노가리 골목에서 간판까지 사라진 을지OB베어는 이제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노란 조끼를 입은 용역이 가게 앞을 지키고 서서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가게 앞에는 강제집행을 실시해 부동산 인도를 완료한 건물이라는 경고문과 부동산인도집행조서가 나붙었다. 2015년 서울시가 지정한 ‘서울미래유산’도, 2018년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지정 표식도 법원 판결과 강제 철거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21일 열린 을지OB베어 강제집행 규탄 긴급 촛불기도회에 참석한 시민이 자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청년들은 갑작스러운 투쟁 구호와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에게 곳곳에서 개인별 설명이 이뤄졌다. 외국인은 또 다른 외국인에게 만선호프의 밀어내기로 작은 가게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고 전했고 아이를 데리고 촛불기도회에 참석한 어머니는 딸에게 을지OB베어의 흔적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취기 오른 청춘들도 친구들에게 노가리 골목의 역사를 읊으며 사건을 브리핑했다.
 
21일 을지OB베어를 찾은 단골 부부가 경고문을 보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촛불기도회가 한참인 오후 8시 30분. 익숙한 듯 빠른 발걸음으로 을지OB베어를 향하던 부부는 이내 토끼 눈을 하며 가게 앞에 얼어붙었다. 이들은 한참을 가게 앞에 서서 문에 붙어있는 경고문과 부동산인도집행조서를 바라봤다.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그대로 서서 말이 없었다.
 
을지OB베어의 오랜 단골이라는 이들 부부는 이날 강제 철거 소식을 모르고 가게를 방문했다.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 가게를 찾았지만 이들은 황망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각종 푯말을 읽고 발언을 듣던 부부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남편은 “나 진짜 눈물나려 한다”고 말했고 아내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라는 외마디만 나누고 또 말이 없었다. 애꿎은 옆 가게 손님들을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힘없는 주먹으로 구호를 따라 외쳐보는 것이 단골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촛불기도회가 끝나고 이들 부부는 최 사장에게 달려가 인사를 나눴다. “힘내세요”라는 말과 함께 포옹을 하며 마음을 전했다. 촛불기도회가 끝난 지 15분이 넘도록 이들 부부는 또 말없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2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소재 을지OB베어 가게 앞에 경고문이 붙어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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