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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과 아그라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수’를 사랑한다. 순수란 무엇일까? 사전은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이라 풀이하고 있다. 다른 말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상태다. 순수는 특정한 물질, 개념, 상황을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것과 구분되거나 반대되는 것을 불순물로 규정해야 비로소 성립된다. 그러나 순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라기보다 관념에 머무는 추상에 가깝다. 순수한 물질이 있을까? 극소수의 원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물질은 이질적 원자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자 역시 다른 분자와 뒤섞여 있다. 실험실에서 만든 증류수가 아닌, 현실의 다양한 장소에 존재하는 물속엔 H2O 외에 수없이 다른 물질이 포함돼 있다. 심지어 생수병에 담긴 물속에도 미량의 미네랄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어떤가? 청정 지역에서조차도 질소, 수소, 산소만이 아니라 염분, 피톤치드, 미세 꽃가루를 함께 들여 마시게 된다. 며칠 전 인도 북부의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을 여행하고 왔다.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무굴제국의 다섯 번째 왕 샤자 한이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한 왕비 뭄타즈 마할이 사망하자 그녀를 애도하기 위해 무덤으로 조성된 이슬람식 건축이다. 타지마할에서 육안으로 바라다보이는 곳에 아그라 성이 있다. 샤자 한의 선대 왕 악바르는 아그라 성 안 왕궁을 축조하면서 자신의 종교 이슬람 ‘생명의 나무’ 문양뿐만 아니라 불교의 ‘卍(만)’ 자, 흰두교의 ‘연꽃’, 기독교, 자이나교의 상징 문양까지 골고루 배치했다. 악바르는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었다. 악바르의 사회통합적 리더십이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만드는 주춧돌이었다. 샤자 한은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과시했지만 무굴제국 멸망의 단초를 만들고 말았다. 샤자한은 이슬람 위주의 통치를 강화했으며 이교도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슬람 신자와 이교도들 간 갈등이 격화됐다.  결국 샤자 한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타지마할 건설에 막대한 국부를 쏟아부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과오 때문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됐다. 샤자 한은 타지마할이 바라다보이는 감옥에 갇혀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오늘날까지 타지마할은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당대 백성들에겐 극렬한 고통의 상징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 정치는 샤자 한의 길을 걷고 있다. 상대주의적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절대주의적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다. 집권하면 모든 정치적, 정책적 가치의 정당성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처럼 국정을 운영한다. 과거 목소리를 높였던 자신의 정치적 주장일지라도 상대방이 되풀이하면 손바닥 뒤집듯 반대 입장을 취한다. 같은 당내에서조차 한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내면 ‘정치적 이지매’를 당하는 순혈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종교, 지역, 세대, 커뮤니티, 직장 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나타난다. 완고한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설 자리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다.   순수는 성숙, 완성 이전의 상태를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아이들의 표정, 초심자의 눈빛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순수는 변화와 향상의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타지마할보다 더 눈부시다. 변화와 향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순수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복수’를 부르는 우리 사회바야흐로 ‘복수의 시대’입니다. ‘복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복수의 사전적 의미는 ‘원수를 갚음’입니다. 긍정적 단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복수에 열광 중입니다.    중국의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봐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것이다”라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를 강조한 노자답습니다. 노자가 지금 대한민국에 산다면 뭐라 할지 궁금해집니다. 그는 여전히 ‘앙갚음’보다 ‘순리’를 강조할 수 있을까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와 SBS 드라마 ‘모범택시’ 시즌2.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사적 복수를 다룬 단 점입니다. 복수란 개념은 선사시대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복수는 인간의 근본적 감정과도 연결된 행위이기에 복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같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합니다. 드라마 즉 콘텐츠가 소비하는 복수는 오랫동안 존재해 온 개념적 스토리의 오브제란 뜻입니다.  분명한 건 과거 시대의 복수와 현대 사회의 복수는 다른 결을 지닌단 겁니다. 기존 복수극은 이랬습니다. 선악이 존재하고 권선징악 흐름 속에 악은 벌을 받습니다. 홍길동전으로 가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은 도적떼 두목이 돼 조선팔도를 돌며 못된 벼슬아치들을 혼내 줍니다. 얼핏 히어로물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복수 장르입니다. 현실에선 엄두도 못 낼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복수를 양반이란 사회구조에 앙갚음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홍길동의 복수는 공적 형태를 띱니다. 자신을 위한 복수가 아닌 탐관 오리들에게 피해 입은 백성을 대신해 복수하는 형태 입니다. 조선 중기 사람들이 홍길동전에 열광했던 건 극중 복수가 공적 명분을 지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홍길동이 도적떼의 왕이 돼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내용이었다면 호응을 얻었을까요. 2023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현대의 복수극으로 가봅니다. 철저히 사적 복수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명분이 있지만 사적 명분이고 사적 명분에 따라 법의 울타리를 넘어선 초법적 형태로 복수가 이뤄집니다. 공적 명분도 없고 복수의 과실을 따 먹는 이도 개인에 불과하지만 그런 사적 복수에 한반도가 들썩입니다.  중요한 건 복수란 콘텐츠 자체가 아닌 이렇게 변화하는 ‘복수의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한 재미로 복수극을 바라볼 게 아니라 왜 이토록 ‘사적 복수’에 모두가 공감하고 열광하는지 그 이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단 뜻입니다. 왜 개인이 초법적 형태의 복수를 감행하고 사람들은 그에 열광할까요. 이유는 단순할 듯 합니다. 법이 개인을 지키지 못한다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지켜주지 못하면 개인이 개인을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엄연히 법과 정의가 존재하지만 재력과 권력에 의해 법이 농락당하기 일쑤입니다. 재력과 권력 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비록 초법적 형태 일지라도) 사적으로 복수하는 길밖에 없는 사회가 이미 도래해 버린 건 아닌가 우려됩니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선 사적 복수가 필요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한때 그렇게 자주 들었던 공정과 상식,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요즘 복수극을 바라보는 솔직한 저의 감상평입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