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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 관점’에서 한동훈을 평가하면? 4.10 총선이 끝났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었다. 민주당 175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을 얻었다.  국민의힘은 왜 이리도 처참하게 패배했을까? 뉴스토마토는 4월 1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총선패배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국민들의 68.0%는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10.0%는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라고 답했다.  흔히 총선은 ‘중간심판론’이 작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양당제가 본격화된 2004년 이후 야당이 실제로 승리한 경우는 2016년 1회밖에 없다. 중간심판론은 작동할 때도 있고,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중간심판론은 언제 작동하고, 작동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다.  중간심판론 - 작동할 때, 작동하지 않을 때  중간심판론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집권당이 반성과 혁신을 통해 중도확장을 하거나, 야당이 더 크게 실책을 하는 경우다. 2004년과 2002년 총선에서 집권여당(민주당 계열)의 승리는 야당이 더 크게 실책한 경우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12월 26일 수락연설을 했다. 보수 쪽에서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 2012년 총선 시기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비슷해지기를 희망했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는 ‘불리한 선거를 뒤집은’ 선거의 교과서로 평가된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①이명박 정부 임기 5년차 ②차기 대선후보로 독보적인 존재감 ③정강정책에 대한 변경이 가능했다. 박근혜 비대위원회는 총선을 바로 앞두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등을 표방하며 정강정책을 바꿔 버렸다. 반면, 2024년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①윤석열 정부 임기 2년차 ②독자적인 파워의 한계 ③독자적인 힘으로 정책변경을 추진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1월 18일 ‘국민 눈높이론’을 이야기하며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가 부적절했다고 지적한다. 같은 날 김경율 비대위원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거론하며 명품백 수수가 부적절했다고 지적한다. 1월 18일은 비대위원장 취임 이후 전국 순회 마지막 일정이었다. ‘선(先) 보수결집, 후(後) 중도확장’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약점을 ‘김건희 여사 논란’으로 보고 약점보완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 앙뚜아네트는 매우 자극적인 사례였다. 용산 대통령실이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던 표현이었다. 1차 중도확장 시도는 불발됐다.  이후 1월 21일~23일에 걸쳐 ‘윤-한 갈등’이 발생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1월 22일 비대위 출근길에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를 거절했다”라고 밝혔다. 윤-한 갈등은 ‘한동훈 아바타론’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윤-한 갈등 이후 중도층 일부가 국민의힘 지지로 합류했다.  집권당은 ‘정책을 수반하는’ 중도확장 행보여야  2월은 민주당에서 ‘비명횡사 공천’ 갈등이 발생했다. 민주당의 내분에 의해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었다. 국면 변화는 3월에 발생했다. 야권에서는 조국혁신당이 등장하고, 여권에서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대사 임명과 ‘대파 논란’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정권심판론에 불이 붙었다. 12월 26일 취임한 이후,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중도확장 행보는 ‘윤-한 갈등’이 사실상 유일하다. 1월 말~2월 중순까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2월 중순이 지나면서 ‘약빨’이 떨어졌다. 윤-한 갈등은 정책변화를 수반하지 않았고, 갈등의 내용이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정책변화’를 수반하는 중도확장 행보를 대폭 강화했어야 한다.  최병천 이기는 정치학 저자


'굿바이 심상정' 그리고 '조국·이준석' 2004년 4월 16일 새벽 2시. 구시대 종말을 알린 일대 사건. 5·16 쿠데타 주역 김종필(JP·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의 퇴장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노회찬(전 정의당 의원)의 당선. 정당 득표율 0.18%포인트 차로 엇갈린 애꿎은 운명. 겨우내 짙은 안개 뒤에 가려진 한 줄기 빛이 희미한 일상을 꿰뚫고 다가왔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또 다른 의미의 '세대·세력' 교체가 단행됐습니다. 진보정치의 잔다르크 심상정(녹색정의당 의원)의 낙선과 조국(조국혁신당 대표)·이준석(개혁신당 대표)의 당선. 1985년 구로동맹 파업을 주도한 '철의 여인'은 그렇게 한 줌의 재로 타버렸습니다. JP와 노회찬 운명 바뀐 '20년 전 새벽' 바야흐로 20년 전 그날, 동트기 전 펼쳐진 반전 드라마. JP는 '봉쇄조항 3%'에 묶였습니다. 그 반작용으로 진보정치의 족쇄는 풀렸습니다. 인민노련의 노회찬이 '박정희정권 2인자' JP를 밀어낸 대사건. 10선을 노린 JP는 4·19 혁명 44주년을 맞은 해에 역사의 퇴안길로 떠났습니다. 17대 총선의 '마지막 당선자'인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의 등장은 그랬습니다.  43년간 JP가 쓴 영욕의 현대사는 노동을 집어삼킨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JP와 바통터치를 한 노회찬은 '인민의 호민관'을 자처했습니다. '남성 식민지' 문화에 짱돌을 던졌습니다. 2004년 그의 1호 법안은 '호주제 폐지.'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엔 '장미꽃'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빵(생존) 못지않게 장미(인권)도 원한다'는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 구호를 한국 사회로 소환했습니다. 기득권에도 도전했습니다. 2005년 삼성그룹·검찰·정치권의 검은 유착관계를 담은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을 폭로했습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왜곡된 역사의 수레바퀴가 긁은 상처는 깊었습니다. 전쟁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둘 떠나는 동지들 몰래 눈물을 삼켰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찾아온 오월,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맸습니다. 진보정치의 지난 20년은 인고의 시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중 맞닥뜨린 2018년 7월 23일. 노회찬이란 별이 진 이후 진보정치는 갈 길을 잃었습니다. 심상정 체제로 명맥을 잇던 녹색정의당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낡은 비전은 대중정당 노선의 이탈을 불렀고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는 되레 역효과를 냈습니다. JP를 밀어낸 봉쇄조항이 이번엔 녹색정의당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6411번(서울 구로동∼개포동) 버스의 시동은 그렇게 꺼졌습니다.6411번 버스 멈춘 자리에 '조국·이준석' 6411번 새벽 버스가 멈춘 자리에 조국과 이준석이 들어왔습니다. JP와 노회찬 만큼의 극적 관계는 아니지만, 이들의 등장도 드라마틱했습니다. 정권심판론의 기폭제 역할을 한 조국혁신당은 22대 총선의 최대 승자로 등극했습니다. 이준석은 4월 11일 새벽 1시50분께 당선이 확정되면서 개인기 하나로 3전 4기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조국의 등장은 야권 세력의 교체, 헌정사 첫 30대 당 대표를 지낸 이준석의 원내 진입은 세대교체를 일군 일대 사건입니다.  하지만 조국·이준석의 등장이 '혁신인지, 퇴행인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력·세대 교체를 한 이들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시대교체입니다. 조국과 이준석이 그 주체라고 단언할 수 없었습니다. 조국은 여전히 '반윤석열정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정치란 공적 시스템을 사적 보복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준석은 '한국판 트럼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무릇 정치란 '상선약수'(최고의 선은 물)와 같아야 합니다. 정치공학을 앞세운 권력투쟁에 매몰된다면, 마치 무중력의 상태로 여의도 어디인가를 배회만 하다가 사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권력을 탐하는 하이에나가 되느냐, 문명사의 풍향계인 시대정신을 선도하느냐. 오롯이 이들의 몫입니다. 노회찬의 새벽 버스는 오늘도 멈춰있습니다.  최신형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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