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피해 속출' 전세제도 없어질까요
입력 : 2023-05-23 06:00:00 수정 : 2023-05-23 06:00:00
전세는 영어로 뭐라고 표기할까요. '재벌'(chaebol), '갑질'(gapjil)처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전세'(jeonse)입니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이기 때문인데요. 1910년 조선 통감부가 작성한 문서에 등장했으니 최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주거형태입니다.
 
전세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건 주거 수단과 동시에 일종의 금융상품이기 때문이죠.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이라는 이름으로 2년간 돈을 빌려주고 만기가 되면 돌려받습니다.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로 주거를 제공받는 방식입니다. 집주인 입장에선 집을 일정 기간 남에게 내어주는 대신 돈을 빌리는 것으로, 2년 만기 채권과 같은 거죠.
 
전세는 가진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집보다 나은 집에서 거주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전세보증금으로 묶인 돈도 일종의 강제 저축 역할을 하면서 나중에 내 집을 마련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습니다. 당장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전세를 놓는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해 집을 살 수 있었죠.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사채이자도 비쌌던 과거 상황에서 세입자 집주인 모두 '윈-윈'이었던 셈입니다. 
 
이면에는 전세보증금의 높은 회수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전세 제도의 신뢰성이 나름 높았던 가장 큰 이유는 지금처럼 개인이 다량의 전세 매물을 보유하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대인 입장에서도 전세 매물은 중요한 자산이었고, 이를 어기는 건 법적 처벌은 물론 사회적 생명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요.
 
하지만 최근 수년간 갭투자가 성행하고 빌라왕들이 우후죽순 탄생하면서 이같은 요인은 과거의 유물이 됐습니다. 집값의 70%를 넘어서는 전세물건이 과거보다 많아졌고 40년 전에 없던 전세대출상품도 생겼습니다. 돈 단위가 커지고, 조달도 쉬워졌습니다. 부동산 사기 범죄자들이 이런 상황을 악용해 안정적인 보증금 강탈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죠.
 
다수의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전세 대출이 시장을 왜곡했다고 분석합니다. 2020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평가한 보고서에서 “전세 제도는 잠재적 차환 리스크(rollover risk)를 가지고 있다”며 미리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전세는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본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 문제가 갈수록 커지면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 제도의 종말을 예고했는데요. 집주인(임대인)이 세입자에게 목돈을 받고 다음 세입자가 없거나 시세가 집값보다 아래로 내려가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돌려막기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손보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전세 거주자가 2020년 기준 국민의 15.5%인 상황에서 인위적인 폐지는 혼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전세는 집값 급등락 때마다 종말론에 직면했지만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는데요. 서울부동산정보광장 통계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전세 비중은 지난해 12월 47.3%까지 줄었다가 3월 61.5%로 증가하였으며 다세대·연립주택의 전세 비중도 올해 들어 1월 50.3%, 2월 52.9%, 3월 56.8% 등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매달 소모성으로 지출해야 하는 월세보다 전세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세입자들이 많기 때문이죠.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세가 소멸되면 모를까, 정부가 인위적으로 강제한다면 부작용이 더 불거질 수 있습니다. 전세로 살고자 하는 국민의 의사는 존중돼야 하고 각자의 판단에 따른 선택을 막을 수도 없죠. 다만 전세 포비아가 커진 만큼 문제가 되는 전세대출을 축소하고 월세의 소득공제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세 수요를 월세로 전화하는 방안 등이 검토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강영관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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