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싫지만 증세는 결사반대"…'반(反)복지 심연'에 빠져드는 한국
소득 적을수록 증세 통한 복지 반대…정부도 '복지망국론' 설파하며 공약마저 파기
입력 : 2015-12-16 07:00:00 수정 : 2015-12-16 07:00:00
"한 달에 100만원 좀 넘게 버는데 세금 더 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나요? 내가 세금 낸다고 국가에서 정규직으로 만들어 줄 것도 아니잖아요." 
 
한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부의 복지재정 확충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정치권 일부 주장에 대해 손사래부터 쳤다. 복지와 소득 재분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를 불만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유리지갑인 월급쟁이의 경우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조세 평등에 대한 불신이 큰 것도 현실이다.
 
이처럼 조세 저항에 기반한 반복지 정서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불평등의 양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새누리당 정책연구소인 여의도연구원이 지난 7월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도 '사회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증세론에 대해 동의(32.4%)와 반대(36.9%)가 팽팽히 맞섰다.
 
앞서 2012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도 흐름은 비슷하다. 복지를 위한 증세의 필요성을 묻자 '복지수준이 낮아져도 세금을 더 내려야 한다'(26.0%)와 '현재 복지수준과 세금은 적정하다'(25.4%)는 응답이 51.4%를 차지했다.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응답은 40.0%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정서가 정부와 경제계의 반복지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인 사회 취약계층일수록 공감도가 크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를 보면, 복지 증세를 반대하는 연령은 60대가 34.6%로 가장 높았으며, 소득수준에서는 월 소득 100~199만원(34.1%), 100만원 미만(32.9%) 순으로 높았다. 반면 소득수준이 월 300만원을 넘는 경우 복지를 위한 증세론에 찬성하는 경향이 강했다. 
 
사진/뉴스토마토
 
현실을 뒤집는 여론은 공약의 폐기를 낳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이내 규제 철폐를 주장하며 후보 시절 약속을 폐기했다. 누리과정 공약을 파기, 보육대란 속에서도 명분은 예산 부족이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대선 공약 파기를 반성했지만, 결과는 축출이었다.  
 
집권여당이 과잉복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 정부는 불평등과 그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을 축소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9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된 보고서(The Inclusive Growth and Development Report 2015)를 인용하면서 "WEF는 우리나라를 대규모 재정 이전 없이 양호한 수준의 소득 형평성을 달성한 국가로 분류(했다)"며 "대부분의 소득분배 지표가 개선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정작 WEF 보고서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한국경제에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도가 낮고 남녀 간 임금 격차도 있다. 사회 여러 부문에서 독과점적 이익을 누리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된 부분은 빠졌다. WEF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주택과 금융자산 소유 정도가 낮고 보건의료를 포함한 사회적 보호도 제한된 것으로 분석됐다.
 
결과적으로 소득 형평성은 비교적 우수하다고 평가됐지만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를 기준으로 한 실질 형평성에서는 평가가 낮았다. WEF는 이를 기초로,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냈다. 하지만 기재부는 이런 내용은 생략한 채 표면적으로 드러난 소득 재분배 효과만 강조하는 등 정부 정책 선전에 집중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복지 확대 요구에 대해 유럽의 재정위기를 근거로 "복지 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진다"고 면박을 준다. 정부는 입맛에 맞게 왜곡된 자료를 내밀며 우리나라에서 불평등이 개선되고 있지 않느냐고 거든다. 더 나아가 불평등과 그로 인한 경제적 궁핍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의지 부족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기득권의 한 축을 이루는 보수언론의 여론몰이가 더해지면서 일반 국민은 한 푼이라도 아쉬운 돈이 세금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는 듯하다. 불평등의 구조적 본질은 잊혀지고, 개인이 감내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를 쓴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는 "반복지 논리는 가난을 의존 문화, 성품과 태도의 문제, 노동윤리와 책임의식의 실종 탓으로 환원한다"며 "시장과 국가, 사회가 핑퐁하듯 사회·경제적 약자를 내치는 와중에 한국사회는 갈수록 반복지의 심연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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