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이의 지혜를 잘 빌린다
(제자백가로 나를 배우다⑧)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공부: 순자의 '대청명'
입력 : 2022-04-19 06:00:00 수정 : 2022-04-19 06:00:00
《순자(荀子)》에는 순자가 얼마나 합리적인 사상가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화가 한 대목 나온다. 먼저 이 대화를 음미해보자.
 
어떤 사람: 기우제를 지내면 왜 비가 옵니까?
순자: 기우제 안 지내도 (올 비는) 온다.
어떤 사람: 그렇다면 기우제는 왜 지냅니까?
순자: 비가 오라고 지내는 게 아니라, 가뭄 들어서 속이 타들어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荀子》<天論>)
 
이 대화는 순자가 얼마나 합리적인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백미다. “기우제를 지내면 왜 비가 옵니까?”라는 질문은 매우 위험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개구라’로 답했다가는, 큰 곤혹을 치를 수 있다. 어떤 답변을 하느냐에 따라 끝없는 미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떠오르는 답은 백성들이 지극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드렸기 때문에 하늘이 감동해 비를 내려 주신 것이라는 식의 답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질문한 사람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감동한 것이냐?” “인격신인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냐?” 등등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순자의 대답은 쿨하기 그지없다. “기우제 안 지내도 비는 (때가 되면) 온다.” 기우제를 드려서 비가 왔다는, 확인이 불가능한 인과관계를 동원하는 대신, 순자는 비가 올 때가 됐으니 내린 것이라는 합리적인 대답을 준 것이다.
 
‘어떤 사람’도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또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 드려서 비가 오는 게 아니라면 왜 기우제를 지내냐”는 것이다. 여기에도 순자는 대답이 준비돼 있다. 기우제라는 것은 가뭄이 들어 타들어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문지(文之)]’해주는 형식이란 설명이다. 순자의 말 가운데 “문지(文之)”라고 한 대목은 번역이 어려운데 여기서 ‘문(文)’이란 “꾸며 주다”라는 뜻이다. 나는 이를 ‘표현해 준다’라고 옮겨 의역했다.
 
순자에 따르면 기우제는 가뭄이 들어 타들어 가는 농민들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형식이다. (사진=농촌진흥청·뉴시스)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기우제라는 행위도, 그 기우제를 드리는 백성의 마음도, 그 현상을 바라보는 의문도 해소가 된다. 합리적 판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면 현실을 투명하게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순자가 말한 마음이 크고, 맑고, 밝은 상태 바로 ‘대청명(大淸明, 크게 깨끗하고 밝은 상태)’의 상태에 이른다. 
 
주희는 왜 순자를 버렸나
 
유학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학문이라 여긴다. 조선 선비들이 받아들인 유학은 공자의 원시 유학이 아니라 북송 때 주희가 개작한 주희성리학(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네 가지 서책을 유학에서 경전 수준으로 중요한 책으로 꼽으며 이를 ‘사서(四書)’라고 불렀다. 주희는 《순자(苟子)》를 ‘사서’에서 배제했다.
 
나는 이 사실이 주희의 안목 수준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이후 주자학이 공거공담을 일삼는 어리석고 폐쇄적인 학문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나는 대학에서 ‘사서(四書)’에 대해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면, 《순자》를 포함시켜 ‘오서(五書)’를 강의한다. 유학에 관심이 있다면 주희의 도그마를 떠나 ‘사서’가 아닌 ‘오서’를 공부할 것을 권한다.
 
순자는 어떤 인물일까. 순자는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다. 제(濟)나라의 왕립아카데미라 할 수 있는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격인 ‘좨주(祭酒)’라는 자리를 세 번이나 연임했다. 전국시대 쟁쟁한 제자백가들이 다 몰려들었던 직하학궁의 제주를 세 차례 연임했다는 데서 그가 각 학파의 논객들의 주요 주장을 모두 섭렵할 충분한 시간과 자료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자의 일생을 일별해보면 19년 동안 세상을 떠돌기만 하고 현실 정치에 아무런 참여도 경험도 겪어보지 못한 공자나 맹자의 이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정치의 경험을 중앙에서부터 자신의 봉지 통치까지 제대로 경험해본 인물이다. 이런 이력 덕분에 《순자》에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감각과 언어가 번뜩인다. 《순자》에 실린 <악기(樂記)>라는 글은, 오늘날에는 전해져 오지 않는 경전이지만, 한나라 때 여섯 경전(六經) 가운데 하나로 중시되었던《악경(樂經)》의 내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기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다. 그러나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 악독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후천적으로 갈고 닦고 변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타고난 성인, 타고난 군주는 없고, 누구든지 후천적으로 갈고 닦음에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포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순자는 인간이 모두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나 배가 고프면 먹고자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피곤하면 쉬기를 바라고,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한다. 이런 공통점은 사람들이 날 때부터 지닌 것으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우임금 같은 선한 군주나 걸임금 같은 폭군이나 같다. 그러니 누구든지 요임금이나 우임금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걸임금이나 도척 같은 포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수나 장인이 될 수도 있고, 누구든지 농민이나 상인이 될 수도 있다.(《荀子》<榮辱>)
 
순자의 성악설은 부족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측면도 있다. 순자의 관점에 의하면 누구나 소인으로 태어난다. 소인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고 스승도 필요하고 법도도 필요한 것이다. 
 
순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성장하는 것, 인생의 모든 과정이 공부의 연속이다. 인생의 매 시기마다 스승을 찾으며,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소인의 길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매일 공부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사물을 이용하는 공부
 
순자는 유가 철학자답게 학문과 배움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는데, 그 방법론을 정리한 글이 바로 “학문을 권하노라”라는 뜻의 ‘<권학(勸學)>’이라는 글이다.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푸르다”라는 뜻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온 글이기도 하다. 배움의 길에 들어선 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 정독해볼 것을 권권하고 싶을 정도로 명문장인 좋은 글이다. 순자의 <권학>에서 가장 먼저 살펴볼 공부법은 ‘사물의 힘을 잘 빌리는 공부’다. 
 
   나는 일찍이 멀리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바라본 적이 있는데 높은 산 위에 올라 멀리 보는 것만 같지 않았다. 높은 산에 올라 손짓을 하면 어깨가 길어진 게 아니건만 먼 곳에 있는 사람도 볼 수 있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소리 지르면 목소리가 커진 게 아니건만 듣는 사람이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마차의 힘을 빌려 길 떠나는 사람은 발걸음이 빠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고, 배의 힘을 빌려 길 떠나는 사람은 헤엄을 칠 줄 모르더라도 강을 건널 수 있다. 군자가 타고난 바탕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사물의 힘을 잘 빌리는 사람인 것이다.(《荀子》<勸學>)
 
순자가 군자란 “사물의 힘을 잘 빌리는 사람(善假於物)”이라고 정의한 것은 매우 뛰어난 통찰이다.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카피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표절을 정당화하는 발언이 아니라, 자신이 더 향상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먼저 찾으라는 말이다. 순자가 말하는 사물의 힘이 꼭 어떤 도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닮고자 하는 위대한 인물이나 자신이 도전하고자 하는 분야의 성과도 이에 해당한다. 순자의 위 발언은 뉴턴을 떠올리게 한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영국 과학자 뉴턴은 1676년 그의 논적이던 로버트 후크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순자는 뉴턴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떻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라고 말하고 있을까?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카피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파블로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 특별전' 당시 모습. (사진=뉴시스)
 
이 논리는 스승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글의 연재를 시작할 때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려고 하는 것의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순자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움에는 그 사람(其人)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좋은) 방법도 없다.(學莫便乎近其人. 《荀子》<勸學>)
 
순자의 이 말에서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나는 ‘스승으로 삼을 만한 그런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순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란, 자신이 들어선 배움의 길에서 자신이 따라 배우고 싶은 사람이다. 요즘 말로 ‘롤 모델’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순자가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좋은) 배움의 길은 없다”고 했을 때 ‘가까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의 말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훌륭한 공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법으로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따라 써보는 ‘필사(筆寫)’라는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좋은 방법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 모두 ‘따라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흉내내다가 말을 배운다. 나 또한 비슷한 깨달음을 관찰 한 바 있다. 어린 딸이 어느 날 “우율래”라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말에서 ‘~하고 싶다’는 표현은 대부분 ‘~ㄹ래’라는 어미로 끝난다. “잘래”, ”쉴래“, “먹을래” 등과 같이 말이다. 딸아이는 이 구조를 받아들여 ‘우유를 먹고 싶다’는 표현을 “우율래”라고 한 것이다. 
 
순자가 말한 “그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공부법도 이런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문청들이 자기가 베스트로 꼽은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베끼듯이, 기타나 피아노 악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이 최고로 꼽는 거장의 연주를 그대로 베끼는 과정에서 언젠가 자기 목소리와 자기 체취를 만들어서 ‘우율래!’라고 외치는 순간이 닥칠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이런 관점 또한 ‘성악설’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보잘것 없이 태어나지만 사물을 이용하고, ‘그 사람’을 가까이하고, 흉내냄으로써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가려진 것을 치우는 공부
 
순자가 말하는 두 번째 공부법을 가려진 것을 치우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해폐(解蔽)>라는 글에 나온다. 
 
   그러므로 (전면적 인식을) 가리는 것은 다음과 같다 : 하고자 함에 가려지고, 싫어함에 가려진다. 시작하는 것만 보면 가려지고, 끝만 보면 가려진다. 먼 것만 보면 가려지고, 가까운 것만 보면 가려진다. 넓은 것만 봄으로써 가려지고, 얕은 것만 봄으로써 가려진다. 옛것만 봄으로써 가려지고, 오늘의 것만 봄으로써 가려진다. 무릇 만물은 모두 서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가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쓰는 방법이 두루 겪는 근심이다.(《荀子》<解蔽>)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해도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하는 법이다. 항상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무엇에만 몰두하느라 무엇을 못 보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순자는 이를 당시 제자백가 사상가들을 예로 들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묵자(묵적)는 실용에 가려 문화를 몰랐고, 송자(송경)는 욕망에 가려 충족을 몰랐으며, 신자(신도)는 법치에 가려 현인 통치를 몰랐고, 신자(신불해)는 권력 정치에 가려 지략 정치를 몰랐으며, 혜자(혜시)는 말에 가려 실질을 몰랐고, 장자(장주)는 하늘에 가려 사람을 몰랐다.(《荀子》<解蔽>) 
 
당시 제자백가들의 대표 사상가들이 모두 모여 백화쟁명을 벌이던 직하학궁의 총장격인 ‘좨주(祭酒)’를 세 번이나 지낸 순자가 여러 제자백가들의 학문의 맹점을 정확하게 비판했다고 했는데, 이 대목은 그의 날카로운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합리적인 사람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세 번째로 순자는 사람의 마음을 크고 맑고 밝은 상태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마음은 한 시도 쉬는 때가 없다. 매일 같이 걱정에 시달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이 비워지고 오롯해지고 고요해지는 것일까? 앞에서 인용했던 순자의 기우제에 대한 대화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마음은 세상으로부터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타인으로부터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기준점이다. 마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지식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타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놓치게 된다. 
 
마음을 맑게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의 탈을 쓰고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맑지 않으면 동시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어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이다. 
 
지극한 합리성에 기반한 순자의 사상은 옹졸한 인간이 위대한 생각과 발견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고, 기이하고 불안한 일이 벌어져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며,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고, 인간사가 진일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순자가 지향했던 공부는 거인의 어깨와 맑은 마음을 다 얻는 공부다.
 
이상수 철학연구자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주역 연구로 석사를, 제자백가의 논리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웅진씽크빅 중국법인장,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을 지냈다. 공자·노자·장자·손자·순자·한비자 등 제자백가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고전의 현재적인 번역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효·김만중·정약용 등 한국철학 연구에 빠져있다. 저서로 <아큐를 위한 변명> <한비자, 권력의 기술> <바보새 이야기>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등이 있다.
 
(표=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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