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의 한국철학사 3화)신화시대 한국 철학의 특질과 인간 중심의 신화
입력 : 2023-03-20 06:00:00 수정 : 2023-03-20 06:00:00
먼저 드릴 말씀은 한국의 신화와 전설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부터 철학사를 시작한다는 데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화와 전설이라는 것은 그것이 누가 기록했는지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신화와 전설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인 디엔에이에 각인되어 있는 컨텐츠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철학과 한국철학사는 한국의 신화와 전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화와 전설 가운데 우리가 검토해야 될 자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려시대 승려인 일연(一然) 스님에 의해서 문자로 정착된 단군신화와 김알지 신화, 석탈해 신화와 박혁거세 신화 등 ‘문자로 정착된 신화’입니다. 이것 이외에 또 한 가지 전승은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 풍부하게 남아 있는 신화와 전설의 세계입니다. 고구려 고분군에 남아 있는 벽화의 세계는 문자로 정착되지는 못했으나, 우리 민족의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신화와 전설을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남아있는 일연 스님이 문자로 정착시킨 신화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에 활동한 일연 스님은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뒤 《삼국사기》에서 부족한 부분들, 김부식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삭제해 버렸던 이야기들을 모아서 《삼국유사》를 편찬했습니다.
 
《삼국유사》를 써서 단군신화 등 우리 겨레의 중요한 문화 콘텐츠를 문자로 정착시켜 오늘날까지 전해지도록한 고려조의 일연 스님. 사진=필자 제공
김부식은 유학자로서 이른바 ‘유가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가차 없이 삭제해서 역사 기록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김부식은 분명히 《삼국사기》를 기록할 때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원초 기록들을 참고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삼국사기》를 검토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뒤에 김부식은 자기의 작품인 《삼국사기》가 이 시대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이 참고했던 원래 자료들을 말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풍류도(風流道, 우리의 고유한 전통사상)와 관련이 있는 문헌들이 고려 중기에 발생한 ‘묘청의 난’을 계기로 집중 말살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칭제건원(稱帝建元, 우리 땅의 왕도 중국과 대등하게 ‘황제’라는 명칭을 쓰고, 황제처럼 자신의 고유한 연호를 쓰자는 주장)을 주창했던 묘청, 정지상 등 서경파들은 고유의 풍류도 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었는데, 이들을 유학과 사대주의 사상을 신봉하던 개경파가 진압하면서 풍류도와 관련이 있는 문헌들을 모두 말살했다는 주장입니다.
 
묘청의 난 진압 이후 김부식 등 개성파들이 우리 고유의 토착 신앙과 사유를 담고 있는 《고기(古記)》 등 풍류도와 관련 문헌들을 모두 말살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역사 초》. 사진=필자 제공
개경파의 우두머리이던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묘청의 난을 직접 진압하였으며, 묘청의 난 진압 이후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던 우리 고유의 토착 신앙과 사유를 담고 있는 《고기(古記)》 등의 풍류도와 관련이 있는 문헌들을 모두 말살했다는 것입니다[신채호,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단재신채호전집ㆍ중권》(서울: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 1972)], 121쪽]. 우리가 《삼국사기》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작성하기 위해서 참고했던 고구려 신라 백제의 원래 자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부식은 이를 ‘유가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자신의 관점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모두 가차 없이 삭제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기록이 매우 제한되도록, 우리의 컨텐츠가 매우 협소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 일연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나, 고주몽 신화, 박혁거세 신화, 김알지 신화 등 우리 문화의 콘텐츠를 폭넓게 오늘날까지도 전해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김부식의 유교 합리주의는 유교 합리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조차도 깜짝 놀라며 엄격하게 반대할 그런 성질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것이었습니다.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 범어사 소장본. 사진=필자 제공
한국 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세계의 모든 신화의 중심에는 오로지 신이 존재하지만, 세계의 무수한 신화 가운데 한국 신화에만 그 중심에 인간이 있습니다. 한국 신화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든가 중국 신화처럼 전능하거나 난폭한 신들이 등장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고 멋대로 농락하고 괴롭히고 놀리는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신입니다. 이 점이 한국 신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사유, 이것이 한국 신화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일연 스님이 기록한 단군신화를 보면, 신에 대한 인간의 예속이나 복종의 의무를 표현한 대목은 없습니다. 인간이 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찬양해야 한다던가, 신에게 제물이나 제사를 바치라는 등 어떤 의무를 져야 한다는 내용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죠.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동물이 지켜야 했던, 쑥과 마늘만 먹으라는 금기가 유일하게 신이 이 땅의 생명체에게 부과한 의무 사항입니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함[홍익인간(弘益人間)]”이었지, 인간의 숭배를 받거나 인간을 지배하거나 세상을 물이나 불로 심판하기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거느리고 온 하늘의 신적 존재들도 바람과 비와 구름 등 인간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바람 아저씨[풍백(風伯)], 비 선생[우사(雨師)], 구름 선생[운사(雲師)] 등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인도, 히브리 신화 등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악행만 일삼는 고약한 신이나 음침하고 고약하고 사악한 사탄 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골탕 먹이거나 들들 볶고 괴롭히거나 해치고 강간하는 못된 폭군과 같은 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울 사직단의 단군성전에 조성돼 있는 단군상. 사진=필자 제공
고주몽,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의 신화에도 신적인 힘이 배경에 등장하지만, 인간에게 숭배를 요구하거나 의무를 부여하는 행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죠. 이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신적인 존재에 의해 잉태되어 알 등에서 태어나 흰 말과 붉은 용 등 신비한 존재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말고는 신의 작위함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인 이들이 신적인 존재로부터 잉태되거나 도움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신의 자손들로 인정받습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한국 신화에서는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원형적 사유형태인 신화에서 신은 절대적인 지배자의 모습으로 군림하지 않고, 인간 세상을 보살피고 인간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가설적인 주장이지만, 이런 원형적 사유의 DNA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효는 하나의 종파에 매달리지 않고 모든 종파의 서로 다른 주장을 조화시키는 화쟁(和諍)의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고, 사색당파가 살벌하게 싸울 때에도 조선의 선비들은 탕평(蕩平)의 사유를 빚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압도적인 무력으로 압박해오는 서구 열강 세력의 함포 소리를 들으면서도 홍대용과 이규경과 최한기는 동서의 사유를 종합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최제우는 천주교의 신봉을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하던 살벌한 시대에 살면서도 천주교를 동아시아의 유불도와 융합하고 종합하여 동학(東學)을 창건해냈습니다. 동학사상이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人乃天)]”이라는 위대한 명제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신이 인간에게 군림하는 절대자로 존재하는 대신, 사람 세상에 널리 이로움을 주는 존재로 삼은 한국 신화의 원형적 사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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