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강허달림, ‘사랑의 우주’ 그려낸 하늘색 블루스
12년 만에 정규 3집 'LOVE'…"제주살이, 바람과 햇살 스며든 음악"
가족부터 환경문제까지…"동굴 깊이 숨겨 놓은 사랑의 가치 깨달아"
입력 : 2023-04-13 00:00:00 수정 : 2023-04-13 00: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모니터에서 하늘색 미풍이 불어온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양양 하조대와 제주 해안가 얘기를 듣다보니 눈앞을 일렁이는 상상의 공감각적 잔상들.
 
"청춘 시절에는 마음이 벅차다 싶으면, 베낭 하나 들쳐 메고 가는 곳이 바다였어요. 무지하게 넓은 백사장 위로 예쁘게 수놓아진 수평선, 에너지가 다 소진됐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이었거든요. 바다가 보이는 앞에서 우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자택에서 화상 모니터를 켠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50)이 달항아리처럼 둥근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12년 만에 정규 3집 'LOVE'로 돌아온 한국 대표 '블루스의 디바'. '두렵고 불안했던 청춘 시절을 지나 자유롭고 편안한 자신의 현재를 기록한 음반' 답게 바다 풍경을 떠올립니다.
 
"2013년 아이를 낳았고, 2015년 12월 말 우연찮게 남편과 제주로 내려왔어요. 제주의 바람과 햇살이 제 음악과 삶의 변화에도 찬찬히 스며든 것이죠." 
 
팬데믹 기간, 차츰 아이가 자라면서부터 틈틈이 녹음해 둔 멜로디 프레이즈들(주요 구간)을 정리했다고. 인간과 펭귄이 꼭 껴안고 있는 한 작품을 보며, 그간 가족을 돌보느라 아등바등 살아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사랑을 주제로 앨범을 쓰게 됐다고 합니다.
 
'괜찮아/ 그래요 괜찮아/ 그런대로 살면 좀 어때/그것도 인생'(곡 '괜찮아요 Blues') 한국적 토종 블루스의 멜로디와 리듬, 진하고 깊은 생의 향이 우러나오는 쫀득쫀득한 목소리, 불안의 청춘 시기를 지나 삶을 굽어보는 완숙과 여유….
 
12년 만에 정규 3집 'LOVE'로 돌아온 한국 대표 '블루스의 디바' 강허달림. 사진=HLM KOREA
 
한국을 대표하는 이 '블루스 디바'에게서 어느덧 묻어납니다. 신촌블루스 '아쉬움'의 오렌지 빛 가득한 생의 향기 같은 것이.
 
쪼개지는 리듬들은 흡사 투명하게 부서지는 제주의 바닷물, 시원하게 불어오는 포근한 멜로디는 하늘색 바람.
 
"장르를 떠나서 제 음악에 대한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기타나 피아노 하나에 무리 없이 한 곡이 들려진다고 한다면, 어떤 편곡을 붙여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다라는. 밥 딜런이나 조니 미첼 같은 옛 블루스 포크 음악들도 그렇죠. 그래서 피아노로 한번 쳐보고 또 기타를 연주했을 때, 만족할 만큼의 멜로디 라인부터 정해요."
 
타이틀곡 '러브'는 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숭고함으로부터 사랑에 관한 개념을 확장하며, 앨범 전체를 잇는 주제곡과도 같습니다. 어쿠스틱 기타의 잔잔한 울림이 실어 나르는 깊고 섬세한 가사는 '깊은 우주 같은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랜 기간 저는 사실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공간을 내어주는 게 손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거든요. '뾰족함의 대마왕'이었달까요. 그러다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번 곡 작업을 하면서는 타인 때문에 속 끓이면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던 어린 시절의 저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혼자 음악으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스스로가 단단하게 부여잡는 버팀목이 돼야 했거든요."
 
12년 만에 정규 3집 'LOVE'로 돌아온 한국 대표 '블루스의 디바' 강허달림. 사진=HLM KOREA
 
배우자와 아이를 통해 걸음마처럼 배워온 사랑의 세계와 내면의 변화를 그대로 투영한 음반입니다. 이틀간 2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 8시간씩, 16곡을 녹음했다고 합니다. "블루스나 재즈 음악을 제가 좋아해서 그런지 가장 악기 다운 소리로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예전 신촌블루스 활동 때 40~50대가 넘어서야 노래의 맛을 안다고 하시던 선배님들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저도 이제 한국 나이 50줄이니까 노래의 맛이 이런 거로구나 조금은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앨범은 곡 ‘마음 그, 달’에서부터 관조적으로 시선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구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순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전하는 위로입니다.
 
"보지 못했던 세상의 한 구석이라든지, 삶의 시선이 조금 넓어지고 있는 것을 느껴요. 기후변화에 대해 아이와 토론도 자주하고요. 가끔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달빛처럼 은은하게 비춰주고 내려주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아픈 구석들에 빛이 내려서 우리 아이들이 좋은 세상을 살아갔으면 해요."
 
마지막 곡 ‘다시 행복해지려 합니다’는 불안하고 예민하고 섬세했던 과거의 자신과 작별을 다짐하는 여운의 곡입니다. 코드 진행을 최소화하며 앨범을 마무리 짓는 이 곡에 대해 그는 "저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살았던, 사랑하고 행복하고 싶었던 마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12년 만에 정규 3집 'LOVE'로 돌아온 한국 대표 '블루스의 디바' 강허달림이 가족들과 찍은 사진. 사진=강허달림 공식 유튜브

강허달림은 1997년 서울재즈아카데미를 1기 보컬 전공으로 수료하며 음악계에 늦깎이로 입문했습니다. 2003~2004년 엄인호·이정선의 신촌블루스에서 마지막 여성 보컬로 활약하며 주목받았습니다. "김현식-한영애-이은미-엄인호-이정선... 당시에는 워낙 걸출한 선배들이 많아 '너도 노래 한가닥 하겠네?' 하는 그 시선을 싫어했는데요. 지금은 정말로 자랑하고 싶어요. 블루지한 풍의 한국 가요 그 맥을 계속 이어갔으면 해요. 엄 선생님은 한국의 밥딜런이시죠. 다음 음반 땐 꼭 모시고 싶어요."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 그러나 특유 삶의 질곡을 두른, 민요가락처럼도 들리는 강허달림 만의 블루스는 계속 이어질 터. 오는 5월 5일 서울 노들섬라이브하우스에서 앨범 발매 기념 단독 공연도 엽니다. "제 원초적 본능을 따라가다 보니 블루스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민요가락의 정서와 12마디가 반복되는 블루스는 일견 유사한 데가 있어요. 블루스라는 틀에 저를 가두기는 싫어요."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공간으로 표현한다면 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다니는 여행을 너무 좋아했어요. 유적지 답사를 좋아해서 지도 한 장 프린트해서 들고 버스를 타곤 했는데요. 식구가 생기면서 이제는 혼자 다니는 게 재미가 없어졌어요. 팬데믹 기간 가장 위안이 됐던 건 저희 집 정원이에요. 나무 심고 꽃 심고 가꾸다 보니, 사시사철 어느 부분에서 꽃이 펴요. 나무가 많이 우거지니까, 새들도 얼마나 찾아오는지 몰라요. 어디 갈 필요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로 앞에는 숲도 있고 바다도 보이고, 이제 이 곳이 나의 여행지이죠."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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