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신흥무관학교 교관의 기록물
입력 : 2024-02-06 06:00:00 수정 : 2024-02-06 06:00:00
지난달에 충북 옥천에서 중학생 스무 명을 모아놓고 ‘사회탐구 글쓰기-나도 기자’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청소년 진로 찾기 글쓰기 교육의 한 과정이었다.
 
기사 형태 글쓰기는 사실 위주로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기록하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하면 대부분 휘발되어 버린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신문 기사를 뒷날 역사 자료로 활용하는 일도 흔하다. 나는 학생들한테 기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취재와 기사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한국 국방안보에 매우 중요한 기록물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이 2023년에 발간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만주 서간도에 세운 독립운동가 양성 기관으로 1911~1920년 10년 동안 3천5백명의 항일전쟁 인력을 배출했다. 독립전쟁 역사에 빛나는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1933년 대전자령 전투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이었다.
 
원병상의 아버지는 국권을 되찾고자 해외 기지를 건설한다는 독립운동 방침에 따라 일가족을 데리고 1910년 경북 울진 고향을 떠났다. 장남 원병상이 그때 열다섯 살이었다. 서간도의 삶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풍토병과 재해에 시달렸고, 친일 부역자한테 악행을 당했다. 아버지는 이주한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원병상에게 신흥무관학교 입교를 명령했다.
 
신흥무관학교는 3개월, 6개월 속성반, 4년제 과정 등으로 운영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과 병농일치를 실행했다. 원병상은 1913년 4년제 본과 3기생으로 입교해 정규 과정을 했다. 졸업 뒤 교칙에 따라 출신 마을 한인 소학교 교사가 되어 낮에는 어린이를 가르치고 밤에는 청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1919년 모교 교관으로 부임했다.
 
원병상이 공부할 때 에피소드가 있다. 학교장 이동녕 선생이 따뜻하게 맞아주어 입교했는데 수학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고향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만 해서였다. 어쩔 수 없이 인근 소학교에 1년간 다닌 다음에 신흥무관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원병상은 해방 뒤 서울로 돌아왔다.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에서 활동기반을 잡기가 어려웠다. 원병상은 독립운동 지도자 주선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54세 나이에 5주 군사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곳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1956년 나이 한계에 걸려 62세 대령으로 예편한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30대 나이에 별을 주렁주렁 달고 참모총장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늙은 독립운동가가 수모를 견디며 하급장교로 전전한 사연도 굴곡진 우리 국방 역사의 단면 아닐까.
 
이 회고록은 원병상이 1951년부터 1973년 별세할 때까지 20년간 작성한 원고를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손봐서 펴냈다. 원병상은 단순히 기억에 의존한 게 아니라 일기와 같은 기록을 유지했고 이를 토대로 회고록을 쓴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상황 묘사가 상세하고 다른 역사 자료와 비교해 검증해도 무리가 없어서다.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탄압을 피하려고 활동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일제 경찰 수사기록만 넘치고, 독립투사 시각을 담은 기록은 매우 적다. 이런 상황에서 원병상 회고록은 신흥무관학교 운영과 나라를 잃고 떠돌았던 한인들의 고단한 삶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다.
 
옥천 교육 때 나는 인터뷰와 기사 작성 실습을 병행했다. 학생들이 모두 언론사 기자가 되지 않더라도, 자기 생활을 기록하고 세상을 관찰해 기록하며 살아가길 기대했다. 원병상 선생이 그렇게 살았다.
 
박창식 전 국방홍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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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