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순록과 고래의 자취를 간직한 북극의 땅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26)
입력 : 2024-05-27 06:00:00 수정 : 2024-05-27 13:36:02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닫힌 문 뒤의 찰림-바레 암각화
 
로보제로 방문은 여정 도중 다소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어서 급히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로보제로 툰드라는 여러 호수가 있는 자연경관 덕분에 트레킹 산지로 인기가 있어 여름철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그렇다 보니 산지에서 조금 떨어진 로보제로마을의 몇 개 안 되는 숙소도 꽉 찼던 것인데, 다행히 공동숙소의 방 하나를 구했다. 저녁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빗속을 종종 걸어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가 전시실은 폐쇄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박물관에 있는 찰림-바레 암각화 바위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폐쇄라니! 미리 확인한 박물관 안내사항에 그런 공지는 없었고 숙소 주인도 박물관이 열려 있다고 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부터 박물관이 3일간 내부 리모델링에 들어가 4일째 되는 날 재개관을 하고 새롭게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같은 숙소에 머물던 사람들이 바로 이 작업을 위해 멀리 다른 도시에서 불려온 박물관 보수공사 전문가들이었다! 
 
내부 공사 이후의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 모습. 찰림-바레 암각화의 돌 5가 전시돼 있다. 사진=로보제로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 제공
 
실망감에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닫혀 있는 전시실 문만 바라보았다. “잠깐이라도 볼 수 없나요? 멀리 한국에서 왔는데요…” “이미 포장돼서 보관 중이라 불가능합니다.” “그럼 사진이라도 얻을 수 없을까요?” 이후의 일정 때문에 공사가 끝날 때까지 여러 날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책에서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나는 박물관 직원 안나 사크마르키나 씨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녀는 예전에 찍어둔 전시실 내 암각화 바위 사진을 그 자리에서 이메일로 전달하고 나중에 리모델링된 전시실의 바위 사진도 새로 보내 주었다.
 
내부 공사 이후의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 모습. 찰림-바레 암각화의 돌 5(우)가 전시돼 있고 영상에 돌 1이 보인다(좌). 사진=로보제로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 제공
 
1988년 박물관으로 옮겨진 찰림-바레 암각화의 돌 5에는 총 155개의 이미지들이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다. 그중 14개가 사람 형상, 34개가 순록과 엘크 등 동물 형상이다. 다수의 이미지는 모호해서 정체를 알 수 없다. 형상은 성별을 구분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여성과 사슴 암컷에게는 둥근 배가 묘사된다. 출산 중인 여성과 사슴의 형상도 보인다. 작은 인간은 어머니의 오른쪽 다리에, 새끼 사슴은 엄마 사슴의 뒷다리 사이에 있다. 출산 이미지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여성이 사람이 아닌 새끼 사슴을 낳는 장면이다. 여성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에 새끼 사슴이 그려져 있고 여성은 오른손으로 수컷 사슴의 다리를 잡고 있다. 수컷의 긴 주둥이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의 주둥이에 닿아 있다. 이 독특한 그림은 사미족의 토템을 반영한 ‘사슴인간 먄다시’ 신화를 상기시킨다(본 연재 24회 참고). 하지만 찰림-바레 암각화와 사미족 문화와의 연관성에 대해 학술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으며 단지 상상과 추측을 할 뿐이다. 찰림-바레 암각화는 카노제로 암각화와 묘사방식상의 유사성을 갖지만 동시에 독자적이다. 이 암각화는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고 연대 측정을 위한 데이터가 없다 보니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카노제로 암각화에 의존해 기원전 4000~2000년 정도로 막연히 추정되고 있다.
 
찰림-바레 암각화 돌 5의 일부로, 왼쪽 중앙에 여성이 새끼 사슴을 출산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사진=콜파코프, 슘킨, 무라시킨(Е. Колпаков, В. Шумкин, А. Мурашкин) 공저, ‘찰림-바레 암각화’ 2018, 137쪽.
 
사미족 마을에서 순록과 인간을 생각하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찰림-바레 암각화를 직접 보는 것엔 실패했지만, 대신 눈길을 끄는 박물관 앞 기념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옛 소련의 대부분 지역이 그렇듯이, 한쪽에는 1941~1945년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중에 전사한 로보제로 출신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소련 북극권의 수호자인 순록사육자들에게” 바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후자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토착소수종족들이 북극권의 카렐리야 전선에서 순록수송부대로 활약했던 역사가 떠올라서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네네츠 자치구의 나리얀마르TV가 제작한 ‘위업의 길(Путь подвига, 2010)’과 무르만스크주 로보제로의 주민인 쿠즈네초프(В. Кузнецов) 감독이 만든 다큐영화 ‘북부기병대(Северная кавалерия, 2015)’가 그것이다. 사실, 로보제로를 알게 된 것도 이 영화 덕분이었다. 소련 국방부 아카이브에 따르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순록수송부대는 총 1만142명의 부상병들을 전장 밖으로 실어 나르고 임무를 수행할 군인 7985명을 이송했으며, 1만7084톤의 사료·탄약·무기 등의 화물과 162대의 파손 항공기를 수송했다. 그러나 1945년 승전 퍼레이드 때 개막 행진을 한 카렐리야 전선 병사들 속에 순록부대는 포함되지 않았고, 소련 국민은 북방의 토착민들과 그들의 순록이 만든 역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로보제로의 '콜라 사미족 역사·문화·생활박물관' 앞에 "소련 북극권의 수호자인 순록사육자들에게"라고 쓰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박성현
 
비를 맞으며 마을을 둘러보는데, 버스정류장 안쪽에 그려진 순록벽화가 인상적이다. 정류장에서 만난 한 주민의 설명에 따르면, ‘솝키나’라는 여성 아마추어 화가가 자신이 살았던 생활을 회상해 그린 것이라 한다. 나중에 검색을 통해 그녀를 찾았는데 사미족의 문화와 전통을 연구·보존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직접 그렸는지 주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에 탄 사람들과 헤엄쳐 강을 건너는 순록 떼, 순록유목민의 전통적 이동가옥인 원추형 천막 ‘춤(чум)’ 안에 모여 있는 가족이 묘사된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림 제작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자기가 자라나고 살았던 툰드라를 생각하면서, 그 시절과 생활을 추억하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북부기병대’의 감독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부는 그들의 집입니다. 순록은 사미족에게 삶의 의미입니다. 사미족에게서 순록을 빼앗는 것은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는 것처럼 보입니다. <…> 순록은 <…> 북부의 다른 종족들에게 그렇듯이, 사미족에게는 그들의 형제입니다.”
 
로보제로마을의 버스정류장 안쪽 벽에 순록과 사미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박성현
 
마을을 걷다 보니 한 건물에 커다란 순록과 찰림-바레 암각화의 형상들이 벽면에 그려져 있다. 거대한 사슴은 인간어머니와 사슴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슴인간 먄다시를 묘사한 게 아닐까? 사미족 신화에서는 사람이 낳은 사슴이 인간에게 사냥법을 가르치고 야생순록을 사냥할 수 있게 돕는데, 유라시아 극동북극권인 추코트카의 에스키모(유픽족) 신화에서는 여인이 낳은 고래가 ‘형제’인 인간을 먹이기 위해 고래를 몰고 온다. 고대인의 의식 속에서 사슴과 인간, 고래와 인간은 하나의 혈통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몸을 선물로 내주는 그들과, 생존을 위해 그들을 사냥하지만 감사를 잊지 않고 그들이 재생할 수 있도록 의례를 행한 고대인들의 모습은 인간과 자연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준다 하겠다.
 
로보제로마을의 한 건물 벽에 커다란 순록과 찰림-바레 암각화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사진=박성현
 
로보제로마을은 콜라 사미족의 ‘수도’로 간주되는데, 이곳에서 실제 순록을 볼 수는 없다. 순록은 ‘툰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농업생산협동조합에서 사육되며 툰드라에서 풀을 뜯는다. 이 협동조합은 순록을 소유한 로보제로의 주요 기업이다. 개인의 순록 사육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스스로 무리를 방목하기 어렵고 수익성이 없다 보니, 개인 소유인 순록도 주로 협동농장의 무리와 함께 방목되고 있다. 러시아의 사미족은 북유럽국가의 사미족보다 훨씬 적어서 1500~2000명 사이이며 대부분 로보제르스키군에 거주한다. 처음에는 콜라반도 전체에 분산돼 반(半)유목생활을 했지만, 1960년대 중반 정착지통합프로그램에 따라 많은 여름주거지가 있던 바렌츠해 기슭을 떠나 아파트가 있는 로보제로마을과 다른 정착지들로 이주해야 했다.
 
로보제로마을의 건물. 사진=박성현
 
무르만스크에서 만난 고래뼈와 북극의 해안 풍경
 
다음날 새벽 로보제로를 떠나 무르만스크로 향했다. 버스로 노르웨이의 시르케네스를 거쳐 알타 암각화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무르만스크에서 시간이 없었지만 2023년 2월 겨울의 무르만스크를 방문했을 때 고래뼈 조각을 보았다.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의 뼛조각으로 아래턱 일부인데, 1970년대 말 어선을 통해 북대서양에서 무르만스크시에 위치한 크니포비치 해양수산·해양학 극지연구소(ПИНРО)로 전달됐다.
 
무르만스크시의 크니포비치 해양수산·해양학 극지연구소(ПИНРО)에 전시된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의 뼛조각으로 아래턱의 일부이다. 사진=박성현
 
즈뱌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바이어던’(Leviathan, 2014)의 촬영지였던 테리베르카 해안에 영화 소품으로 사용된 대왕고래의 뼈대 모형이 남아 있다. 사진=박성현
 
무르만스크시에서 약 120km 떨어진 콜라반도의 테리베르카마을은 바렌츠해에 접해 있다. 테리베르카는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바이어던(Leviathan, 2014)’의 촬영지로, 영화 덕분에 관광지가 된 곳이다. 이곳에는 영화의 소품으로 사용된 대왕고래의 뼈대 모형도 있지만, 실제 고래뼈도 있다. 2019년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테리베르카 근처 폭포 뒤쪽의 만(灣)으로 향유고래가 밀려왔는데 그 뼈대가 해안에 전시돼 있다. 테리베르카는 일명 ‘드래곤 알’이라 불리는 해변과 선박 무덤, 폭포 등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북극해의 일부인 바렌츠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러시아의 북단이다. 바렌츠해에서 고래사냥을 하던 이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9년에 테리베르카 근처로 밀려온 향유고래의 뼈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박성현
 
러시아 북단 테리베르카의 폭포지대에서 바라본 바렌츠해.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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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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