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발상법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한다
(제자백가로 나를 배우다⑦)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공부: 장자의 '만물일체'
입력 : 2022-04-12 06:00:10 수정 : 2022-04-12 09:35:03
궁핍한 시대의 자유로운 공부법
 
맹자에 이어 살펴볼 사람은 바로 장자(莊子)다. 장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의 몽(蒙) 땅 사람으로 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유려한 산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초(楚)나라 위왕(威王)에게서 칠원리(漆園吏)라는 말단 벼슬을 받은 바 있다. 칠원리는 제후국의 산림을 지키는 산림지기를 말한다. 산림지기였던 장자는 호방한 상상력을 발휘해 〈소요유〉 등 빼어난 글을 많이 남겼다. 
 
맹자와 장자는 전국시대 동시대에 활동한 사상가들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공자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국시대 유학의 대표적 사상가가 됐다. 장자 또한 마찬가지다. 노자를 직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국시대 도가(道家) 사상의 중심인물이 됐다.
  
공자의 사상을 맹자에게 전해준 인물로 공자의 논자인 자사(子思)가 꼽한다. 자사는 유가의 경전 중 하나인 《중용(中庸)》를 지은 사람이자 맹자의 스승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 사이에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 있어 노자와 장자를 이어줬을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장자는 노자를 책으로 보아 그 사상을 흡수했을 것이다.
 
장자와 그의 후학들의 글 모음집으로 불리는 《장자》는 모두 33편의 글로 되어 있다. ‘내편(內編)’ 7편, ‘외편(外編)’ 15편, ‘잡편(雜編)’ 21편 등으로 나뉘어 묶여 있다.
 
장자는 뛰어난 문장과 표현력으로 사물과 현실을 잘 묘사함으로써 유가와 묵가의 주장을 논박했는데, 당시 뛰어난 학자들 가운데 누구도 그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마천은 그의 말이 넓은 바다처럼 종횡무진했으며, 그 스스로 그런 언변이 자신의 성정에 맞는다고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천자, 제후, 귀족이 자신을 써먹을 수 없다고 여겼다.(《史記》<老子韓非列傳>) 
 
경계 없는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제자백가들이 생각의 한계를 깨트리게 하는 통찰을 주지만,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훈련은 장자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장자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나비의 꿈’이다. 이는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야기로 밤에 장자가 꿈을 꾸다 나비가 되었는데 마음껏 날아다녀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신이 본디 장자인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나 보니 자신이 장자인 것이다.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莊子》<齊物論>) 
 
장자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바로 ‘물화’다. ‘물화(物化)’란 나비, 사람, 나무, 꽃 등 삼라만상이 각각 자신의 경계 안에 머물러 서로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물화된 사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를 만들어 간다. 그러나 이 물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를 한다면 어떤 경지가 열릴까? 장자의 공부는 사유와 생각의 경계를 넘게 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드는 공부다. 장자에게는 ‘나비의 꿈’ 외에도 꿈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꿈속에서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던 이가 아침에 깨어나서는 슬피 운다. 꿈속에서 슬피 울던 이가 아침에 깨어나서는 상쾌하게 사냥을 나선다. 막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그 꿈에 대해 점을 쳐보기도 하지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게 꿈이었음을 안다. 큰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이것이 한바탕 큰 꿈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어있는 줄 알고 똑똑한 체하며 지혜롭다 여긴다.(《莊子》<齊物論>)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빚어내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인식과 생각의 깨우침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지동설을 깨닫기 전 천동설을 믿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꿈과 같은 생각’을 현실로 믿었던 것이다. 생각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과거의 ‘묶인 생각’ 자체로부터 달아나는 일이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는 이어져 있는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다. ‘나비의 꿈’에서 장자가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나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물화’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생각을 풀어놓는 네 가지 방법
 
장자를 읽어가다보면 우리의 사고가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사상을 ‘생각을 풀어놓는 공부법’이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대목 대목마다 흥미로운 가르침이 많지만 네 가지 정도의 방법에 주목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중 첫째는 ‘보는 힘’을 먼저 기르는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발상이란 없던 것을 찾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다르게, 꿰뚫어 보는 훈련에서 시작한다. 
 
《장자》<양생주(養生主)> 편에는 ‘포정해우(包丁解牛, 포정이 소의 각을 뜨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양(梁)나라에 포정이라는 솜씨 좋은 백정이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냥 덩어리로 보이는 소를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뼈, 살, 근육 등을 해체하는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왕이 구경을 하러 올 정도였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포정의 말이 중요하다. 
 
포정은 처음에는 소를 대할 때면, 소 몸뚱아리 전체가 보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3년이 지난 뒤에는 더 이상 소가 보이지 않고 소의 몸 내부의 근육과 신경의 길만 보였다고 말한다.
 
포정이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길’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이런 경지를 알고 있는 듯하다. 
 
미켈란젤로가 큰 돌덩이를 정으로 쪼며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돌덩어리 가지고 무얼 하느냐”고 물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답했다. “이 돌덩어리 속에 천사가 갇혀 있기 때문에 그를 꺼내주려고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돌덩어리가 돌덩어리로 보이지 않고 그 안에 천사가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장자가 말한 포정의 이야기는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와 맥락이 같다. 자유로운 생각은 ‘끝없이 들여다보는 공부’, ‘겉과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공부’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의 임무란 돌 속에 갇혀 있는 인물들을 끌어내어 생명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웅크린 소년'. (사진=연합뉴스)
 
두 번째는 같음과 다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장자의 말을 살펴보자.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며, 같다는 관점에서 보면 온갖 것은 모두 하나다.(自其異者視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 萬物皆一也。 《莊子》<德充符>)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보이지 않고 (이쪽에서 보면 저쪽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그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을 따라 나온다.(《莊子》<齊物論>) 
 
우리가 논쟁할 때를 생각해보자. 서로 열심히 말을 하는데 계속 같은 논지 안에서 빙빙 돌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 조정, 합의, 타협 등이 불가능한 것은 서로 차이가 크거나, 누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좁은 시야에서 보기 때문이다. 상대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하고, 한 차원 높은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혹은 제3의 입장을 넣어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될까?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이 같은 편으로 보이고, 이쪽의 주장이 도리어 저쪽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생각이 자유로운 사람은 다툼이 많지 않다.
 
‘잘 판단한다’는 것은 ‘항상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각이 굳어지지 않게 하려면, 항상 ‘큰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장자의 이런 통찰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서로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보는 것을 일러 ‘크다’고 한다.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려고 남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일러 ‘넓다’고 한다. 서로 다른 만물을 가지는 것을 일러 ‘부유하다’고 한다. (…) 삼라만상이 한 지붕 아래 있으며, 죽음과 삶이 같은 모양이다.(《莊子》<天地>)
 
셋째, 관계가 없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장자의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허리띠의 은고리를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마음이 흔들리고, 황금을 걸고 활을 쏘면 눈앞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 재주는 마찬가지인데 연연하는 바가 생기게 되면 외물(外物)을 중히 여기게 되니, 외물을 중히 여기는 자는 속마음이 졸렬해지는 것이다.(《莊子》<達生>)
 
탁월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활을 잘 쏘는 일을 하려면, 보상을 얻는 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장자의 이 비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실제와 관계없는 것에 속박되고 매이게 될 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비유에서처럼 몸에 익은 활 쏘는 일도 무엇인가에 마음이 매이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데, 새로운 아이디어는 더욱 그러하다. 생각은 ‘빚지지’ 않아야 자유롭다.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럴 때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매여 있는 생각은 자신의 삶을 끝없이 무언가에 구속하게 만든다. 무엇에 매이지 않아야 할까? 장자의 사상 중에 ‘경물중생(輕物重生)’이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자기 바깥의 ‘외물’을 가볍게 여기고 삶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경물중생에서 말하는 ‘물(物)’은 인간의 본질인 생명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장자는 권력, 금력, 폭력, 명예, 명성 등을 모두 ‘외물(外物)’로 여긴다.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기 삶을 위한 공부를 추구하는 태도가 경물중생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장자에서 우리의 공부를 위해 배울 점은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장자는 ‘자대(自大)’의 편견을 깨라고 했다. 이를 강을 의인화한 황하의 신 하백(河伯)과 바다를 의인화한 북쪽 바다의 신 북해약(北海若)의 우화로 설명하고 있다. 
 
가을에 물이 불어날 때가 되어 온갖 강물이 황하로 모여들었다. 물의 흐름이 넓게 퍼져 양쪽의 물가와 모래톱과 강둑 사이에 있는 동물이 소인지 말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황하의 신인 하백은 기뻐하며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신에게 모여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황하가 동쪽으로 흘러 북녘 바다에 이르렀을 때다. 동쪽을 보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백은 비로소 얼굴을 돌려 북해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말하기를 ‘백 가지를 들으면 누구나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또 저는 일찍이 중니(仲尼)의 식견을 부족하게 여기고, 백이(伯夷)의 절의를 가볍게 여기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다할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그대의 문 앞에 다다르지 않았으면 위태로웠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큰 도를 터득한 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을 테니까요.”
 
중니는 공자의 자(字)로 공자를 일컫고, 백이는 은나라 때 사람으로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 죽었다고 전해오는 성인이다. 중니와 백이처럼 후대의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는 이들도 부족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보다 못한 자신이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깨달음을 고백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본질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
 
장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뭘까? 여기에서 장자의 핵심 사상인 만물일체론을 살펴보자.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뭉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말로 대표되는 장자의 만물일체론을 더 쉽게 이해하는 법이 동곽자와 장자의 대화에 나온다.
 
   동곽자 : “이른바 길[도]라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자 : “없는 곳이 없다.”
   동곽자 : “콕 찍어서 말씀해주셔야 알 수 있겠습니다.”
   장자 :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있다.”
   동곽자 : “어째서 그렇게 낮은 것에 있습니까?”
   장자 : “돌피와 가라지 속에 있다.”
   동곽자 : “어째서 더 내려갑니까?”
   장자 : “기왓장과 벽돌 쪼가리 속에 있다.”
   동곽자 : “어째서 더 심하게 말씀하십니까?”
   장자 : “똥 오줌 속에 있다.”
 
장자는 사고의 편견을 깨고 세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별의 세계보다 전체의 질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장자의 이런 사상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를 실천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장자는 땅강아지와 개미, 기왓장과 벽돌 쪼가리, 똥 오줌에도 길(도)가 있다고 더 심하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까지 받아들여 사고할 수 있는가? 장자가 보여주는 수많은 비유와 일화들은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즐거운 도전이다. 
  
장자의 만물일체는 결국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세상, 심지어 직접 접하지 못하고 있는 더 넓은 바다와 더 넓은 우주를 대상으로 생각을 뛰어오르게 하는 이론이다. 생각의 본질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싶다면, 지금 나를 규정하고 안전하게 했던 요소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장자의 공부법이다.
 
이상수 철학연구자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주역 연구로 석사를, 제자백가의 논리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웅진씽크빅 중국법인장,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을 지냈다. 공자·노자·장자·손자·순자·한비자 등 제자백가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고전의 현재적인 번역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효·김만중·정약용 등 한국철학 연구에 빠져있다. 저서로 <아큐를 위한 변명> <한비자, 권력의 기술> <바보새 이야기>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등이 있다.
 
(표=뉴스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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