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사카모토 류이치가 남긴 음악 유산
“동양 전자음악의 세계적 확장…서구 음악에 대한 아시아의 대답”
안보법·위안부 반대 목소리…동시대성 호흡한 음악인
생전 '예술은 길고, 삶은 짧다'…"음악의 고정관념 질문하고 본질에 다가가"
입력 : 2023-04-05 16:33:43 수정 : 2023-04-05 16:50:52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조금 더 남기고 싶어요."
 
초록 숲을 헤쳐가다 읊조리는 독백, 입에 항암제를 투여하면서도 건반 앞 분투해 가는 숨결 같은 음악, 자연이 조율해준 '쓰나미 피아노'를 어루만지며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소리"를 추구해가는 모습들.
 
2018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CODA'에는 최근 별세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의 생전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찾고, 환경과 평화 운동에 투신하며, 9.11 테러 현장을 찾으며 동시대성과 호흡한 음악인.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에 반대 의사를 지키고, 위안부 관련 일본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백남준과 작품 '올스타 비디오(All Star Video·1984)' 협업으로 예술혼을 나눈 터라 한국인들에게도 친근합니다.
 
2018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CODA'에는 최근 별세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가 등장한다. 입에 항암제를 투여하면서도 건반 앞 분투해 가는 숨결 같은 음악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진=CODA
 
평생에 걸쳐 투신해온 사카모토 삶의 철학은 "예술은 길고, 삶은 짧다"는 것.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난 사카모토는 전자음악을 선도한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 출신입니다. 70년대 서양에 독일 크라프트베르크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사카모토 주축의 일본 YMO가 있었다고 평가됩니다. 70년대 후반 결성돼 전자음악도 오리엔탈리즘을 두를 수 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대표곡 ‘퉁 푸(Tong Poo)’나 ‘코스믹서핑(Cosmic Surfin)’을 틀면 앉아있던 미국인들이 무대 앞으로 우르르 튀어나가 연신 몸을 흔들던 일화가 미 현지 언론에 보도되곤 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온 세 사람의 무대는 동양풍 음악의 첫 미국 침략, 즉 '오리엔탈리즘 인베이전'의 시초였던 셈입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YMO로 전자음악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자음과 신디사이저가 얼마나 멋진 대중음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음악가"라며 "아방가르드와 전위의 매력으로 세계에 어필을 했지만, 전자음악이 신나고 대중적인 팝과 록, 힙합으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아시아 전자음악으로 한정된 것이 아닌 세계적인 전자음악 밴드로 나아갔다는 점이 의의가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에 반대 의사를 지키고, 위안부 관련 일본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백남준과 작품 '올스타 비디오(All Star Video·1984)' 협업으로 예술혼을 나눈 터라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음악가다. 사진=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트위터
 
1983년 팀이 해체됐으나, 사카모토는 오히려 다방면에서 커리어의 꽃을 피웠습니다.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 사운드트랙에서 주제곡 '레인' 등으로 아시아계 최초 골든글로브상, 아카데미상 작곡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2014년 7월 인두암에 걸린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음악 활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 OST, 숲과 빙하 뒤 묻혀있던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며 음반 'ASYNC(2017)' 수록곡들을 탐미해가는 과정은 'CODA'에서 고요한 물처럼 흘러갑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동양 전자음악의 아버지라는 것, 클래식과 현대음악을 동양적인 전자음악에 도입함으로써 서양 음악에 대한 아시아의 대답을 남겼다고 본다"며 "그 이전 맹목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성을 깨며 서양과 융합의 길을 제시했고, YMO 때부터 추구해온 사카모토의 방법론은 90년대 후반 국내 신진 고급 가요의 음악적 방법론과 사운드에 영향을 미쳤다"고 의의를 짚습니다.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 사운드트랙에서 주제곡 '레인' 등으로 아시아계 최초 골든글로브상, 아카데미상 작곡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반열에 올랐다. 사진=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2021년에는 직장암으로 전이된 사실을 공개하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흔한번째 생일인 지난 1월17일에는 음반 '12'를 내놨습니다. 일기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만든 것인데, 피아노·신시사이저를 기반으로 설계한 소리 건축은 아찔한 공(空)의 미학을 펼쳐냅니다.
 
광활한 공간감을 조성하는 전자음이 평면의 대지라면, 피아노 선율과 거친 숨 소리들이 각각 점과 선으로 오로라를 일렁이는 식.
 
가만 집중하다보면 금속성 물체가 달그닥 거리거나, 강아지가 짖고, 살짝 움직일 때 나는 미세한 일상의 소리들도 겹쳐집니다. 흡사 무중력 우주선처럼 설계된 스튜디오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생과 사의 갈림, 존재론적 질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련(修鍊)에 가까운 음악 세계를 마지막까지 펼쳐보인 겁니다. 당시 한국의 세계적인 미술 작가인 이우환 화백이 드로잉한 작품을 앨범 커버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황선업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음악은 탐구할수록 새로운 일면을 드러낸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그가 가진 음악에 대한 정신과 태도가 (그가 남긴 음악 유산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단순히 기존의 소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닌, 그 본질을 파악하고 해체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건드리고 음악의 지속가능성을 넓혀왔다. 의도와 비의도가 격렬히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는 앨범 '12'는, 지금에 와 들어보면 그의 태도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고 봤습니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가 직장암 투병 중에도 지난 17일 발매한 음반 '12' 앨범커버로 이우환 화백의 드로잉을 썼다. 사진=씨엔앨뮤직
 
음악이든, 음악 외적인 대중문화 예술 분야든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오른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2017)의 음악 감독을 맡았고, 2018년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습니다. '오징어게임' 정재일 음악감독,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 밴드 '못' 멤버 겸 싱어송라이터 이이언, 그룹 '방탄소년단(BTS)' 슈가가 그를 존경하는 음악가로 꼽았습니다. 작년 6월 유희열 '아주 사적인 밤'이 자신의 작품 '아쿠아(Aqua)'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였을 때는 논란이 과열되자 공론장에 나서 감싸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일본 음악가로서 이례적으로 한국에서도 추모 물결과 의의를 분석하는 흐름이 일고 있습니다. 음악계 문화 현상으로는 90년대 X재팬 이후, 상징적 사건이라는 평가도 많습니다.
 
이대화 평론가는 "YMO 이후로는 클래식이나 영화음악부터 노이즈 음악에 이르기까지 '품위 있는 음악' 세계를 펼쳤다고 본다"며 "한국인들에게는 세계적인 거장들 중 아시아인이라는 공통점, 한국과의 잦은 교류 등이 친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마지막 콘서트와 앨범까지, 안타까움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로 떠나, 그 추모 열기가 더욱 강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봤습니다.
 
황선업 평론가는 "사카모토 류이치를 ‘일본음악’이라고 인식하고 소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본다. 이미 국경을 아득히 뛰어 넘었고, 그가 전해 준 음악에 대한 탐구심과 정서 구현에 대한 섬세함은 시대와 세대를 가리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YMO 시절이든, 영화음악이든, 그의 피아노 연주든 혹은 그만의 소리실험이 가득한 솔로 작품이든 단순히 장르나 스타일, 대중성을 넘어, 음악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게끔 한 힘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이게 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고 했습니다.
 
2018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CODA'에 등장한 한 장면. 쓰나미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 망가진 피아노를 발견하고 그 소리로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음악으로 구현한다. 사진=CODA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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