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마저 중소형 조선사 외면…RG 발급, 여전히 대형사 위주
작년 중형선 수주 15.5%↓ 'RG 탓'…금융권, '리스크' 이유로 대형 조선사 편애
중국에 1위 빼앗겨…전문가들 "RG 한도상향 등 '선박금융' 확대 필요"
입력 : 2024-06-07 06:00:00 수정 : 2024-06-07 10:49:46
 
[뉴스토마토 임지윤 기자] "국책은행이 뭡니까? 이윤을 최우선 추구하는 시중은행이 돕지 않는 중소기업도 지원하라고 만든 것 아닙니까? 조선업 업황은 지난해부터 개선되고 있는데 선박 수주에 필수적인 선수금 환급보증(RG) 발급은 대형사 위주로만 이뤄지고 있습니다. 대형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RG 보증한도까지 옛날 수준으로 묶여있어 중소형사들은 신규 수주에 어려움이 큽니다."
 
지난 4일 한 중소 조선사 관계자는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업 역시 불황을 겪은 뒤부터 꾸준히 RG 한도 확대를 요구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답답함을 토로한 겁니다.
 
RG 미발급→신용도 하락…'악순환' 반복
 
RG는 중소 조선사에겐 목줄과도 같습니다. 금융권으로부터 RG를 발급받지 못하면 수주가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목줄을 지키기 위해 중소조선사들은 이른바 '빅(Big) 3'로 불리는 대형 조선사(HD한국조선해양·한화오션·삼성중공업)보다 4~10배가량 높은 2~3%의 수수료를 내며 RG 발급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권은 리스크를 이유로 중소 조선사 RG 발급을 꺼립니다. 조선업 호황기 때 RG를 무분별하게 발급하다 불황을 맞으며 대부분 중형조선사가 망하거나 퇴출돼 수백억원씩 손해 본 트라우마가 있어섭니다.
 
2021년 상반기(1~6월) 기준 국내 주요 은행 8곳의 RG 발급액 59억4800만달러 중 중형 조선사에 돌아간 몫은 7.6%인 4억5500만달러에 그쳤습니다. 그마저도 산업은행이 발급액의 상당 부분인 4억2510만달러를 부담한 결과입니다. 이 기간 국내에서 선박금융 지원에 가장 특화됐다는 수출입은행은 대형 조선사에 19억6790만달러 RG를 몰아주는 동안 중형 조선사에겐 고작 1120만달러, 소형 조선사에겐 단 한 건도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난 2월 법정자본금을 기존 15조원에서 25조원으로 늘리는 내용의 수출입은행법 개정안 통과 이후 최근 기획재정부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지분 현물출자방식으로 2조원 추가 투입을 통해 금융 지원 여력 10조원을 확보했지만 중동 인프라·플랜트, 방위산업(방산), 반도체·첨단산업 등에 쓰인다는 얘기만 돌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수출입은행 측에 최근 몇 년간의 RG 발급 실적 내역을 요청했으나 "경영 관련 사항이라 줄 수 없다"며 "주채권 은행으로서 대선조선엔 RG를 발급하고 있고, 저희 기관만의 문제는 아니다"고 답변했습니다. 추가 확보한 10조원 쓰임새에 대해선 "'방산 은행'도 아니고 방산에만 지원하진 않을 것"이라며 "조선업이 업황이 안 좋긴 하지만, 지원 규모가 0원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박 수주가 본격 증가하면서 조선업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난해에도 중소 조선사의 어려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중형 조선산업 2023년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RG 발급 한도 문제와 인력 부족에 의한 내부 문제 등으로 국내 중형 선박 수주량은 전년 대비 15.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5년 세계 중형 조선 시장에서 4.8%를 기록했던 중형사 점유율은 작년 1.8%까지 떨어졌습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중형 조선산업 2023년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세계 중형 조선 시장에서 4.8%를 기록했던 중형사 점유율은 작년 1.8%까지 떨어졌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국책은행마저 중소 조선사를 외면하는 사이 우리나라는 중국에 선박 수주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이 국책은행을 내세워 자국 조선사에 건조비용 최대 80%까지 제작금융을 지원하자 2009년엔 선박 수주량 세계 1위 자리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소 관계자는 "소형 조선사일수록 RG 발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은행은 기업 신용도를 이유로 들고 있지만, 중소형사들은 주문이 들어와도 RG 발급이 안 돼 계약이 무산되고 그래서 다시 신용도가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현실"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이어 "대형 조선사는 RG 발급이 늦어지더라도 자산 매각 등으로 유동자금을 마련할 수 있지만, 중소 조선사들은 담보 능력도 부족해 RG 발급 거절은 치명타"라며 "국책은행에서까지 RG 발급을 못 받으면 사실상 기댈 곳이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국책은행 종사자마저 '절래절래'
 
중소 조선사들은 한결 같이 RG 한도 확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조선업황이 개선된 지금도 수혜를 못 누리고 있어섭니다. RG 한도는 선박가격이 과거보다 40%가량 올랐기에 상향 조정이 절실하지만, 과거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주 물량은 쌓였는데 오히려 수주를 적게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겁니다.
 
이에 한국무역협회는 지난 3일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무조정실 등 관계 부처에 중소 조선사 RG 한도 30% 수준 확대와 별도의 RG 제도로 분리 운영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날 세종청사에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85%인 한국무역보험공사의 중형 조선사 RG 특례보증 비율을 90%까지 확대하는 방안만 발표했을 뿐 한도 관련 언급은 따로 없었습니다.
 
한 국책은행 연구원은 "조선업을 국가 안보 관점에서 매우 중시하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만 조선업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모른다"고 일갈했습니다. RG 한도 상향과 관련해선 "국책은행 입장에선 은행 증자, 조선사 증자, 조선사 신용등급 상승 등이 이뤄지면 RG 한도를 올릴 수 있는데 어느 대안도 현실적이진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은 RG 발급에 있어 금융기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선 선박금융의 제도적 확대가 필요하다고 제언합니다. 선박금융 지원 없이는 조선업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 각각 선박금융공사, 한국해양선박금융공사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출범하진 않았지만 박근혜 정부 땐 해양금융종합센터가, 문재인 정부 땐 한국해양진흥공사가 부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선박금융 규모는 오히려 위축됐습니다. 전형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연구위원에 의하면 2014년 356억달러였던 선박금융은 2019년 78억달러까지 낮아졌습니다.
 
정미경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선 규모가 작은 소기업을 성장과 일자리 창출 동력으로 여겨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며 "독일의 중소 조선사 지원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일각에선 RG 미발급으로 건전성 회복이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당장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 중소형 조선사들에게 이같은 조언은 너무 먼 얘기처럼 들립니다. RG 한도 확대 또는 전문 지원금융기관 설립 등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중형 조선산업 2023년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RG 발급 한도 문제와 인력 부족에 의한 내부 문제 등으로 국내 중형 선박 수주량은 전년 대비 15.5% 감소했다. (사진=케이조선 누리집 갈무리)
 
임지윤 기자 dlawldbs20@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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