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스토리)`증세아닌 증세?`..헷갈리는 우리말
입력 : 2013-08-21 09:00:00 수정 : 2013-08-21 09:00:00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는 홍길동의 이야기를 다들 아실 겁니다. 천한 신분의 어머니 밑에서 서자로 태어나 양반인 부친을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인데요.
 
최근에는 홍길동과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는 공무원들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증세(增稅)'를 '증세'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공무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5년간 무려 135조원의 재원이 필요한 공약들을 내 걸고 당선이 됐는데요. 이 필요재원을 '증세 없이' 불필요한 비과세·감면 정비와 지하경제 양성화, 세출 구조조정 등을 통해서만 충당하겠다는 것 또한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증세 없이 천문학적 금액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공약에 대해 전문가들도 '그게 가능하냐'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일단 행정부 최고 수장인 대통령이 약속한 일이라 공무원들 입장에선 안된다는 말은 할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조세연구원장을 지낸 청와대 경제수석은 물론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기획재정부 공무원 모두가 '증세 없는' 재원마련을 외치고 있습니다.
 
홍길동과 같은 사정은 아니지만,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몸을 사려야만 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의 공무원 '신분'이 만든 상황이라는 점에서 '신분' 때문에 바른말을 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공무원들의 안타까운 상황은 '증세 없는 세원마련'이라는 부조화스런 말 자체가 만들어 냈다고 할수 있습니다.
 
'증세(增稅)'의 사전적 의미는 '세금의 액수를 늘리거나 세율을 높인다'는 것인데, 박 대통령이 약속한 '증세 없는'은 '세율을 올리지 않는다'는 부분만 강조할 뿐 '세금의 액수를 늘린다'는 것은 무시하고, 아예 증세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이 '증세 없는'을 달성하기 위해 내 놓은 세원 확충 대책 그 첫번째, '비과세·감면 정비'를 보면 바로 이 문제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박 대통령과 정부는 '증세 없는' 세원확보를 위해 비과세·감면제도를 대폭 축소·폐지하는 등 대대적으로 정비하겠다고 밝혔는데요. 그 첫번째 작품들이 바로 올해 기획재정부의 세제개편안에 담긴 근로소득공제 축소와 음식업 자영업자의 부가가치세 매입공제율 제한, R&D세액공제 축소 등입니다.
 
비과세·감면은 말 그대로 세금을 깎아주고 있는 제도인데요. 그동안 깎아주던 세금을 내일부터 덜깎아주거나 아예 깎아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해당 납세자는 내야할 세금의 액수가 증가하게 됩니다.
 
근로소득자들은 연말정산에 돌려받을 세금이 줄어드니 1년동안 낼 세금이 늘어나는 것이구요. 연구개발투자(R&D)를 하면 깎아줬던 세금을 고스란히 내야하는 기업들도 당연히 부담하는 세금이 늘어나게 됩니다.
 
부담할 세액이 늘어나는 것이니 명백히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증세'가 맞는 것이죠.
 
정부는 박 대통령의 공약가계부를 발표하면서 비과세·감면 정비로만 5년간 18조원의 공약재원을 조달하겠다고 했습니다. 5년간 18조원의 세액이 늘어나니 5년간 18조원의 증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봐도 증세인 것을 증세라고 하지 못하다 보니 공무원 홍길동들은 '직접적인 증세 없는', '세율 인상 없는' 등의 수사어구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고 그것을 표현할 입도 있지만 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는, 소설 속의 홍길동 못지 않게 안타까운 일이지요.
 
논리에 맞지 않는 '증세 없는 증세' 논쟁을 반복하다 보니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도 말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증세인 것을 '사실상의 증세', '실질적 세부담 증가' 등으로 비틀어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의 증세 논란을 지켜보고 있자면 5년전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시작된 '감세(減稅)'논란이 그대로 재현되는 느낌을 지울수 없는데요.
 
증세와 마찬가지로 '감세'의 사전적 의미도 세금의 액수를 줄이거나 세율을 낮추는 일을 말하지만, 당시에도 정부에서는 세율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감세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줬는지 깎아주지 않았는지 하는 이른바 '부자 감세' 논란이었는데요.
 
정부는 2008년 세제개편에서 종합소득세율은 단계적으로 2010년까지 구간별로 2%포인트 인하하고, 법인세율은 1억원 이하와 1억원 초과로 나뉘던 과표구간을 2억원 이하와 2억원 초과로 상향하며, 법인세율도 낮은구간 세율은 1%포인트, 높은구간 세율은 2%포인트 인하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주요 세목에서의 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 감세정책이었는데요. 이것이 부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된다는 비판과 함께 국회 논의과정에서 소득세와 법인세 모두 각각의 최고세율구간의 세율인하만 유보됐고, 이를 두고 부자에 해당하는 최고세율구간의 세율인하가 없었으니 부자감세가 아니라는 주장과 그래도 부자감세라는 주장이 맞선 것이 부자감세 논란의 시작입니다.
 
사실 이 문제 역시 세율인하는 없었지만 세액감소가 있었으니 정확히 '감세'가 맞는데요.
 
소득세와 법인세의 경우 당시 최고세율 구간의 세율인하는 유보됐지만 누진세율 구조때문에 최고세율 구간에 속한 납세자들도 낮은 구간의 세율이 인하되면서 전체적인 세액이 크게 줄어드는 세액감소의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소득이나 매출이 큰 고소득자와 대기업일수록 혜택도 컸죠.
 
특히 법인세의 경우 과표구간 자체를 상향한데다 2011년 세제개편때에는 2억원~200억원의 중간과표까지 신설해서 감세를 관철시킨바 있어서 대기업들도 200억원 이하의 과표에 대해서는 법인세 부담을 크게 줄였습니다.
 
여기에 '부자'라는 정치적 단어가 조합되면서 엄연한 감세를 두고, 한쪽에서는 감세가 아님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감세가 맞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일이 계속됐던 것이죠.
 
아시다시피 지금도 이명박 정부의 감세가 부자감세냐 아니냐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증세 논란에서도 부자감세를 환원하는 증세를 해야한다는 야권의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증세 없는 증세`는 없는 것임에도 `증세 없는 증세` 논란은 앞으로 계속될 모양입니다.
 
어제(20일)죠? 박근혜 대통령이 무조건 증세부터 얘기할 것이 아니라며 다시 한번 '증세 없는' 공약이행을 강조했습니다.
 
증세를 담은 세제개편안에 직접 사인을 하시고도 '증세 없는'을 연일 강조하시는 이유를 알길이 없을 뿐입니다. 고난이도의 정치서커스인지 국민들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아마 '증세'라는 단어가 가진 정치적인 부담때문이겠거니 하는 추측을 할 따름이죠.
 
박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발표해도 좋다고 결재하신 올해 기획재정부의 세제개편안은 당초안으로 2조2900억원의 추가 세수효과가 있구요. 중산층 증세 논란으로 수정한 개편안으로도 2조원은 거뜬히 더 거둘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입니다.
 
국민들은 이번 세제개편으로 부담할 세액이 최소 2조원 증가하는 것입니다. 세액의 증가나 세율의 인상이 바로 '증세'입니다. 똑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혼란이 사라져야 세상의 혼란도 덜할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사진=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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