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9화)"태평성대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라"
만주 벌판 사람들
입력 : 2016-08-08 06:00:00 수정 : 2016-08-21 11:34:45
교과서로 배우는 역사와 오감으로 배우는 역사가 다르다는 것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실제로 역사 유적지에 가보면 그 차이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격동의 시대, 고난의 민중사가 어린 곳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만주 벌판,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평원에 한족의 집 지붕과는 구분되는 조선족 집들이 때로는 드문드문, 때로는 옹기종기 모여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갈 때 우리가 복잡한 소회를 느낀다면, 이는 아마도 산 넘고 물 건너 간도 땅으로 건너간 동포들의 독립에의 열망과 고단했던 삶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석주 이상룡(1858~1932)
 
한족의 집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삼각형을 이루는 데 비해, 조선족의 집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오각형을 이룬다. 팔작지붕 집이라고 해서 현재도 그 안에 다 조선족이 산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조선 땅에서 만주로 건너간 이들이 처음 집을 지을 때 자신의 문화 그대로 형태를 만들고 유지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다. 1881년 청나라가 '봉금령(封禁令)'을 폐지함으로써 조선인의 간도 유입은 더욱 증가하게 되는데, 지리·역사적으로 볼 때 간도로 건너간 이들의 의식 속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을 넘어간다기보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강을 건넌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을까 싶게 강의 이쪽과 저쪽은 닮은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멀리 한반도 남쪽에서부터 집안 전체를 이주시킨 이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으로는 한성부의 이회영 6형제 일가가 그러하고 안동의 이상룡 일가가 그러하다.
 
눈빛 저 건너까지 닿았다
앉은키가 컸다
< … >
빌려준 것 한푼 받지 않는 몸의 성벽
 
안동 임청각 저택 혼자서 으리으리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나라 내주기 시작했다
임청각 박차고 나가
저 가야산에 들어가 의병을 모았다
 
내가 지난 50년 동안
공자 맹자의 책을 보았는데
마침내 그것은 다 헛말이었구나
 
고향 동지 김동삼 등과 학교 만들어
민족자강운동 시작
매국노 송병준 이용구 목 치라는 상소 올렸다
이윽고 일가친척 다 불렀다
망국 전야
형제와 종형제 재종형제들 아울러
50여 가구
눈보라 망명길 나섰다
 
이에 앞서 노비 풀어
경어로 말하고
전답 다 나눠주었다
 
1911년 1월 5일
가족
친족
하루 잔치 벌여 보낸 뒤
고향을 등지고 바람 찬 길 나섰다
 
압록강 언저리
현지 사정을 알아본 뒤
가족들
친족들 만주땅 서간도 건넜다
 
이로부터 조국광복의 꿈 지지리도 지지리도 고난의 꿈
('석주 이상룡', 17권)
 
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조약'이 발효되자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1907~1911)의 "이동녕 양기탁"은 "1910년 11월" "안동 이상룡에게 밀사를 보냈다 / 조상의 옛터 서간도에서 / 조국광복운동기지를 만들자는 것 / 이상룡 즉각 수락 / 가산을 정리한 뒤 합류"하게 된다. 그는 "고향(을) 떠나며 남긴 시 「거국음(去國吟」"에서 "대지에 그물 친 것 보았거니 / 어찌타 영웅 장부가 해골을 아끼랴 / 고향동산에 좋이 머물며 슬퍼하지 말게나 / 태평성대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라"라고 노래했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신민회', 17권).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신민회 간부들은 1909년 여름 이회영(1867~1932)을 서간도로 파견해 제2의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게 한다. 결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가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로 선정되고 이에 따라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대대적인 만주 이주가 시작된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신민회의 계획을 전해들은 이상룡도 수십 명의 가솔을 이끌고 경상도 안동에서 중국의 유하현 삼원보에 이르기까지 2500리 길을 떠나게 됨은 위의 시가 전하는 바와 같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이상룡 선생은 1911년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에 항일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1912~13년 서리로 인한 흉작 때문에 운영난에 부딪쳐 1914년 해산되고 '부민단(扶民團)'으로 계승되었는데, 이 이름은 '부여의 옛 땅에서 부여 유민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으로 붙여졌다 한다. 부민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 다시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는데, 이 때 만들어진 군정부가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불리게 된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총본영이다. 1911년 음력 4월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에서 "일제 앞잡이와 첩자(를) 따돌"리고 노천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하는 모습을 고은 시인은 "숙연하게끔 / 비장하게끔 / 경학사 창설 회합 / 경학사 취지문 읽어가던 중 / 모인 동포들 눈물바다 이루었네"라고 묘사하고 있다('남만주 어른', 30권).
 
한편 경학사 창설 후 대고산 아래의 옥수수 창고를 빌어 시작된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 칭했지만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라 할 수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이듬해인 1912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해 중학반과 군사반을 운영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많은 청년들이 이 학교를 찾아오자 다시 유하현 고산자가(孤山子街)로 학교를 확장·이전해 1919년 5월3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는 수천 명의 독립군들을 양성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하고 많은 의열단 단원들을 배출했다.
 
일제강점기 서간도지역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강습소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신흥교우보'의 원본. 사진/뉴시스·독립기념관
 
 
지난 2011년 발행됐던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우표. 사진/뉴시스·강원지방우정청
 
다시 이상룡 선생을 그린 다음의 시에는 만주 벌판에 삶을 일구는 독립운동가의 나날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상룡 어른
몸소 물가 땅을 빌려
억새 베고
풀뿌리 걷어내어
논을 만들어
처음으로
한해 벼농사 지어내고
학교 만들어
글과 역사 익히고
가감승제 셈 익히고
군사학교 열어
그 이름 신흥무관학교
왜적 격퇴 전술을 가르치시네
 
밤에는 관솔불 아래
대동역사 지어
역사 지키고
무관학교 졸업자 편성
군정부 총재로 우뚝 섰네
 
경학사 이어
옛 부여시대 후손 자처
부민단으로 나서니
과연
기미년 3·1운동 앞뒤
조선사람 대한사람의 본거가 되었네 거기 어른 계시데
(‘남만주 어른’, 30권)
 
일송 김동삼(1878~1937)
 
이상룡과 동향으로, 함께 설립한 안동의 협동학교 교감을 맡아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켜 구국을 위한 기초로 삼고자 했던 일송(一松) 김동삼 선생은, 1911년 협동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역시 만주로 이주해 무장항쟁 지도자가 된다. 이주 초기 경학사에서 조직과 선전을 맡아 북간도, 서간도의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던 그는 이후 서로군정서 참모장(1919년), 정의부 참모장(1925년) 등 여러 직책을 수행하며 무장투쟁을 수행했다. 김동삼 선생은 1926년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만주에서의 투쟁을 계속했으며, 독립군의 여러 계파들을 통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이다. 하얼삔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6년째 복역하던 중 옥사한 그의 인품과 활약은 군더더기 덧붙일 것 없이 다음의 시로 충분할 듯하다.
 
아이가 넘어졌다
무르팍 피가 났다
아이가 엉엉 울었다
이 녀석아
괜찮다
괜찮다
하며 길가 마른 흙가루를
아이의 무르팍에 뿌려주었다
곧 피는 멎었다
 
이 녀석아 이제 됐다 가거라
 
다친 아이 등을 두들겨 보낸 어른
김동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황톳길에
한동안 서 있다
 
본명 김긍식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후손
고향 안동
이상룡 유인식 들과 협동학교 교감 노릇
 
왜적이 조상의 땅에 발디디자
신민회 참여
서간도로 망명
경학사를 세웠다
< … >
신흥강습소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부민단을 세웠다
한족회를 세웠다
서로군정서 참모장
북로군정서와 연합
각파 통합
통의부 위원장이 되었다
정의부
민족유일당
그리고 서대문 감옥 옥사
 
뭇 독립운동단체와 각 지도자들
서로 갈라서고 배척하는 현실 개탄
그의 이름도
동북 3성의 애국자들
분열되지 말라고
동삼이라 고쳐 지었다
 
매일 1백리 이상
벌판 건너고
재 넘어
서간도에서 북간도
북간도에서 서간도
북간도에서 소만국경
갈라지고 흩어진 지도자들 찾아다녔다
 
어깨에 담요 한 장 걸치고
한푼짜리
만주전병으로 끼니 때우며
그 모진 추위
여름 신발 싸이헤를 신고 다녔다
 
그 너른 이마
그 굴속 같은 눈빛
그 깍아지른 콧날
그 홀쭉 볼
그 구레나룻
그 청인 옷의 묵언
그 일편단심
그의 호
한 소나무
그가 앞장서 참여한
무오독립선언
기미년 선언보다
1년 전의 선언
거기에는
기미년 비폭력에 대해
오직 육탄혈투
독립완성
그것
 
만주사변 뒤
중국 독군(督軍)과의
한중연합군 조직을
협의하고 돌아오다가
하얼삔에서 검거되었다
 
조선인의 전범이었고
조선인의 꿈이었다
그 진정
(‘김동삼’, 18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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