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세상읽기)3월10일, 1898년과 2017년
입력 : 2017-03-10 08:00:00 수정 : 2017-03-10 09:53:10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언론에 나오는 시위는 반북 시위 아니면 반일 시위였다. 반정부 시위와 반미 시위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알았다. 반일 아니면 반미였던 반외세 시위 목록에 이젠 반중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될 것 같아 유감이다. 그런데 같은 목록에 러시아가 빠져 있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아니나 다를까 반러 시위의 역사는 꽤나 오래 되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열강들은 광산, 산림, 어장을 침탈하고 철도와 전선 사업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했다. 특히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첨예했다. 1896년 2월 위기를 느낀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조선의 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자신의 안위를 맡긴 것이다. 일본 침략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왕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고종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 각종 이권을 넘겨야 했다.
 
고종은 1년 후인 1897년 2월에야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했으며 스스로 황제로 승격하였다. 대외적으로 자주 독립을 선언하였다.
 
힘없는 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허세일 뿐이다.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대한제국 안에 건설하려 했다. 황실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에 러시아 장교를 파견하여 훈련을 담당하고 지휘권을 장악했다. 한국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러시아인을 임명하고 한러은행을 창설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마저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고종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국왕 고종이 황제를 칭하는 것에 대해 지식인 계급의 대응은 양면적이었다. 국호를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주 표방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찬성하였다. 하지만 황제권의 강화로 조선 역사에 면면히 흐르던 왕권과 관료 사이의 긴장관계가 흐트러지고 군주가 독주하는 정치체제로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했다. 이때 저항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친러 정책에 대한 반대.
 
친미 성향의 양반 출신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는 1898년 초부터 반러 운동을 시작하면서 정치단체로의 변모를 꾀하였다. 고종 황제에게 '구국운동선언상소'를 올리고 주무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러시아 세력에 대한 견제를 촉구했다. 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임용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고 외무대신은 굴복했다(2017년의 위안부소녀상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기고만장한 요구와 여기에 대한 한국 외무부와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의 비굴한 화답은 판박이처럼 보인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독립협회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1898년 3월10일 약 1만명의 (서울시민이 아니라) 한성부민이 종로에 모였다. 군중이 모여서 무엇을 하겠는가? 바로 시위다. 1만명이 모였다고 해서 만민공동회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요즘으로 치면 50만명이 모인 셈이다(요즘 토요일마다 그 이상의 시민이 모이고 있다). 시위의 주체는 독립협회였으며 시민들은 러시아인 고문과 군부의 군사교관을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반러 시위를 벌였다.
 
1898년 4월부터는 거의 매일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지식인 계급은 점차 발을 뺐다. 독립협회 회원들이 불참하자 시민들은 스스로 대표를 뽑아 회의와 시위를 주관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의 영향을 배제한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수구 권력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들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협회를 탄압했다. 하지만 수구세력도 민중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0월28일부터 11월2일가지 6일간 대규모의 '관민공동회'를 열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력였다. 시민들이 모였다. 관민공동회는 의회설립을 핵심으로 하는 '헌의6조'를 발표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수구파는 독립협회 임원을 구속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민중을 속인 것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 민중들은 다시 일어났다. 해산을 거부하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고종은 보부상을 동원해서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지도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만민공동회가 추진했던 근대적 개혁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오늘은 만민공동회가 처음 열린 지 정확히 119주년 되는 날이다. 오늘날의 전개 상황 역시 119년 전과 사뭇 비슷하지만 결과는 다를 것이다. 119년 전 서울시민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오늘 2017년 3월10일 대한민국 국민들은 승리할 것이다. 11시를 기다린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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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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