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노래한 어느 일본인 시인을 생각하며
입력 : 2019-08-27 06:00:00 수정 : 2019-08-27 14:39:38
먼저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약 100년 전쯤,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느 일본인 시인의 노래다. 
 
어두운 생각이 막힌 커다란 하늘의 가슴을/ 콱 찌른 벌거벗은 나무 뾰쪽한 끝은/움직이지 않고 고뇌의 정점(頂點)을 가리켜 보인다/ 나무 저편에 늘어진 풍경의 막(幕)도 빛깔이 바래고/ 그저 검푸른 자색의 대지 표면에 그을린 빛의 풀 옷을 깔끔치 못하게 걸쳤다/ 나병 환자가 있는 민둥산이 줄곧 이어져 있을 뿐/ 가끔, 아득히 먼 곳에 놀러 가 있던 나무의 영혼이 돌아오듯이/ 참새들이 우듬지에 흡수되어 머물러 있지만/ 그것도 너무나 쓸쓸한 잎들이다/ 엷은 먹빛 떼가 울음을 울어본들/ 억눌린 겨울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참새들이, 흩어져버려서/ 어두운 풍경의 막 그림자로 숨어버리면/ 또 한층 멍해지는 나무의 모습/ 아 그리고 그 밑을 지나가는 것은/ 느린 조선인의 발걸음으로/ 흰옷이 창백한 망령의 그림자를 이끌 뿐 
 
이 작품은 1923년 일본인 시인 우치노 겐지(1899-1944)가 자신의 첫 번 째 시집 『흙담에 그린다(土墻に描く)』에 수록한 「조선 땅 겨울 풍경(鮮土冬景)」 전문이다. 시적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당시 한국의 겨울 풍경이 애상감 가득한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이파리 다 떨어진 겨울나무와 그 우듬지에 앉은 참새들이 울음을 울어본들 억눌린 겨울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과 함께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말미 부분의 묘사다. 즉, 그 적막한 풍경에 흰옷을 입은 조선인이 느린 발걸음으로 창백한 망령의 그림자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서술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산천 풍경과 함께 당시의 겨울을 견뎌내는 조선인의 슬픈 모습이 겹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두운 생각이 막힌 커다란 하늘의 가슴” “나무 저편에 늘어진 풍경의 막(幕)도 빛깔이 바래고” “나병환자” “민둥산”과 같은 표현도 당시의 조선 풍경을 묘사하는 데 유효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시를 쓴 우치노 겐지는 1921년 한국에 와서, 대전중학교와 경성공립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그는 『흙담에 그린다』를 출간하고 나서 일제에 의해 발매금지 및 압수를 당하는 일을 겪었다. 약자에 대한 휴머니스트적인 입장에서 글을 쓴 시인이었지만, 결국 1928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중학교 교사직에서 파면당하며 조선 추방을 선고받는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라이 데쓰(新井徹)’라는 필명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시를 썼다. 다음 인용 시는 그런 성향이 농후한 작품의 하나다.   
        
어느 놈이냐 나를 쫓아내는 놈/ 직업을 박탈당했다 빵을 빼앗겼다/ 나가라고 내동댕이쳤다/ 온돌이여 흙담이여 바가지여 물동이여/ 모두 이별이어라 흰옷의 사람들/ 이 군(李君) 김 군(金君) 박 군(朴君) 주 군(朱君)/ 이름도 없는 거리의 전사(戰士), 거지 군(君)// 고역의 부초(浮草) · 자유노동자 지게꾼/ 안녕 안녕/ 안녕 가난한 내 친구들/ 쳇!/ 쫓겨난다고 해서 그대들을 잊을 것인가/ 쫓겨난다고 해서 포플러나무가 우뚝 솟은 황토를 잊을 것인가(후략)
 
그가 1930년에 출간한 시집 『까치(カチ)』에 실은 「조선이여(朝鮮よ)」의 앞부분이다. 한국에서 추방당하는 우치노 겐지의 심정이 애절하게 읽힌다. 일제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온돌이여 흙담이여 바가지여 물동이여” 그리고 “포플러나무가 우뚝 솟은 황토”를 부르며 자신이 살았던 한국의 풍물을 추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두 이별이어라 흰옷의 사람들” “이 군(李君) 김 군(金君) 박 군(朴君) 주 군(朱君)” “쫓겨난다고 해서 그대들을 잊을 것인가”에는 한국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과 함께 한국인을 사랑했던 그의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안녕 안녕 잠깐의 안녕”이라고 노래했다. 한국인들과의 이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뿐이라며 한국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짙은 그리움을 토로했다.          
 
벌써 2019년의 8월이 기울어 간다. 문득, 일제강점기에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던 일본 시인 우치노 겐지와 그의 시가 떠오르는 것은 한일 갈등으로 이 계절이 여전히 범상치 않기 때문이리라.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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