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2화)역사 기행과 마지막 횡단열차
입력 : 2020-08-24 08:00:00 수정 : 2020-08-24 0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박물관에서 만난 세 가지 이야기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을 안내한 담당자 마리나씨로서는 그 건물의 옛 주인이었던 마리야 알렉세예바와 우랄 지역의 대표적 작가 마민-시비랴크가 얘기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랄 지역 공장 마을의 정교 사제의 아들이었던 마민은 공장 관리자의 딸이자 남편 역시 공장 관리자였던 연상의 기혼녀 마리야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관계는 우랄 지역에 스캔들이 됐고 이 커플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그녀의 세 자녀를 데리고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주한다. 마민은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근처의 집을 사 주고 그곳과 연인의 집을 왕래했지만 얼마 후 하숙생으로 그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에 전시된 마민-시비랴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마리야 알렉세예바의 사진. 그들의 집을 방문한 한 음치 친구가 노래를 부르자 마민이 놀리듯이 귀에 손을 갖다 대고 다른 친구는 잠을 자고 있다는 게 마리나씨의 설명이다. 사진/필자 제공
 
상류사회를 잘 알고 지적이었던 마리야는 작가 생활을 시작한 마민에게 훌륭한 조언자이자 줄거리 제공자, 작품의 교정자 역할을 하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마리야의 딸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민에게 어머니의 집으로 갈 것을 요청했고 이들의 관계는 점차 멀어진다. 마민은 모스크바에서 와 예카테린부르크 시립극장(1843~1912, 현재 콜로세움 영화관)에서 활동하던 젊은 여배우 마리야 아브라모바와 말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버린다. 역시 기혼자였던 그녀는 마민-시비랴크의 두 번째 사실혼 아내가 되어 출산 중에 사망했다. 마민은 무도병을 가지고 태어난 딸을 극진히 아껴 딸을 위한 동화를 쓰고 그녀를 돌보기 위해 유모와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 결핵으로 딸을 잃게 된다.
 
그들이 같이 살 때 마민-시비랴크는 가정교사로 일하고 마리야 알렉세예바는 피아노 교습을 했다. 그녀가 사용하던 19세기 독일제 베커 피아노와 같은 모델을 박물관 측이 구해 전시 중이다. 사진/필자 제공
 
건물의 성격상 그들의 얘기가 중요했겠지만, 실상 나의 눈길을 끈 건 2019년 ‘극장(연극)의 해’를 맞아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스타니슬랍스키와 모스크바 예술극장(므하트)이었고, 마리나씨가 마민-시비랴크의 친구로 소개한 가린-미하일롭스키(1852~1906)의 한국 여행이었다. 이 두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박물관 담당자 마리나씨가 모스크바 예술극장(므하트)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1898년 므하트의 첫 공연인 '차르 표도르 이오아노비치'의 포스터, 공연 장면, 70회 이상 리허설을 했던 모스크바 근교 푸시키노의 헛간(왼쪽부터 시계 방향). 이 공연에서 체홉의 미래 아내가 될 배우 올가 크니뻬르가 황후 역을 맡아 데뷔했다. 사진/필자 제공
 
한국 민담을 러시아에 소개한 가린-미하일롭스키
 
미하일롭스키(본명)는 철도기사이자 ‘가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는 1898년 러시아지리학회 즈베긴초프 탐사대의 일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아직 철도 건설이 안 된 구간은 말이나 배를 타고―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 도착했고 뤼순항, 일본까지 여행한다. 두만강, 백두산, 압록강 일대를 탐사한 그의 기록은 1899년 잡지 기고를 거쳐 1904년 <한국, 만주, 랴오둥반도 기행>이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1890~1900년 사이로 추정되는 니콜라이 가린-미하일롭스키의 사진(M. P. 드미트리예프 촬영). 사진/위키미디어커먼스
 
같은 해에 발간된 그의 책 <1898년 가을에 기록된 한국의 민담>에는 64편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원래 그가 여행 중에 수집한 설화의 수는 100편에 이르지만 노트 한 권을 분실해 아깝게도 많이 줄었다. “한국을 사랑했던 작가”라고 귀띔해 준 박물관 마리나씨의 말처럼, <한국의 민담> 서문에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가린-미하일롭스키의 애정이 드러난다. <한국, 만주, 랴오둥반도 기행>의 한국어판 역자 해제에 바로 이 서문이 인용돼 있는데, 그가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유머와 선량함,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용서할 줄 알며 놀라울 만큼 고결한 사람들이다. < … > 흰옷을 입고 있어서, 겁이 많아서 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을 하얀 백조라고 부른다. 사실이다. 마치 백조처럼 한국인들은 싸울 줄도 모르고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백조처럼 자기들이 만들어 낸 노래와 옛날이야기들을 부를 줄 알 뿐이다.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심지어 삶까지 빼앗는 것은 아이들이나 백조들에게서처럼 너무나 쉬운 일이다. 신식 무기와 좋은 시력만 있다면 말이다. 아, 자기만의 동화의 시기를 아직 벗어나지 않은 이 아이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조선의 민담> 서문 중에서”(가린-미하일롭스키 지음, 이희수 옮김, <러시아인이 바라본 1898년의 한국, 만주, 랴오둥반도 : 가린-미하일롭스키의 여행기>, 동북아역사재단, 2010년, 4-5쪽).
 
세계 연극사의 거장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예르홀드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이 모스크바 예술극장 박물관의 협조를 받아 진행 중인 전시의 이름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사랑’인데, 그 사이에 작은 글씨로 ‘시스템에 따른’이 삽입돼 있다. 즉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 따른 사랑’이 된다.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 겸 배우, 이론가인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가 1900~1910년에 개발한 연기 기법을 흔히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이라 부른 데서 따와 붙인 제목이다. 세계 연극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 거장은 배우로 하여금 신체 행위와 심리 체험이라는 훈련을 통해 역할이 창조되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배우의 사실적인 연기 덕분에 관객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현실로 느끼게 된다.
 
2019년 '극장(연극)의 해'를 맞아 ‘19세기 우랄의 문학 생활’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 따른 사랑' 포스터. 스타니슬랍스키의 가족 사진이다. 사진/필자 제공
 
전시 덕분에, 1995년 여름방학 시기 부산에서 내 생애 최고의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경성대 연극영화과의 연극 전공 교수님이 ‘스타니슬라브스키 제자의 제자’인 러시아 국립연극예술대학(기티스)의 교수님과 현역 배우인 그의 제자를 초청해 학생들을 위한 워크숍을 한 달 간 열었다. 한국과 러시아의 스승, 제자들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가르치고 배우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무대에의 열정이 가득한―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학생들이 신체·심리 훈련을 하느라 뛰고 구르는 옆에서 함께 뛰며 통역을 하던 그 시간은 내게 벅찬 경험이었다. 워낙 연극을 좋아하지만, ‘행복한 알바’를 하게 된 데는 스타니슬랍스키의 공도 크다 하겠다.
 
1898년, 가린-미하일롭스키가 한국을 여행했던 그해에, 스타니슬랍스키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네미로비치단첸코와 함께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설립했다. 이 극장의 역사가 전시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편, 스타니슬랍스키의 제자이자 동료인 메이예르홀드(1874~1940)는 리얼리즘 연극을 최고봉에 올린 스승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반대해 연극의 연극성 회복을 강조했다. 노동자의 움직임에서 발전시킨 ‘생체역학’ 훈련법으로 유명한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를 수용해 독창적인 무대장치와 연기론, 연출론을 확립했고 관객의 능동적 역할과 참여를 중시했다.
 
스탈린 사진 아래 메이예르홀드가 체포된 후 내무인민위원회가 찍은 사진이 보인다. 오른쪽은 1938년 1월 8일자 <프라우다>지에 실린 인민위원소비에트 예술위원회의 명령 '메이예르홀드 극장의 청산에 관하여'. 사진/필자 제공
 
이 또 다른 거장은 그러나 그의 전위적인 연극 이론과 무대를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에 의해 핍박을 받는다. 1938년 1월 8일 메이예르홀드 극장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자, 스타니슬랍스키는 자신이 이끄는 오페라 극장의 연출(감독)직을 그에게 제안해 도왔다. 그해 8월 스타니슬랍스키가 사망한 후 메이예르홀드는 극장의 수석 감독이 되지만, 1939년 6월 레닌그라드에서 체포돼 고문을 받고 1940년 2월 총살당했다. 배우였던 그의 아내 지나이다 라이흐는 남편이 체포된 지 약 한 달 후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신원 불명의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됐는데, 비밀경찰이었던 내무인민위원회의 소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모든 아방가르드 예술과 실험을 탄압했던 스탈린은 그렇게, 혁명의 지지자였던 천재적인 예술가를 ‘인민의 적’으로 만들어 숙청하고 말았다.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
 
이제 제정 러시아와 사회주의 혁명의 과거가 뒤섞인 이 도시를 떠날 때가 됐다. 마리나씨는 박물관의 주소가 혁명가의 이름을 딴 똘마초프 거리 41번지에서 차르 거리 7번지로 바뀐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르 가족을 기리는 피의 교회 때문에 강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차르를 성인으로 추모하지만 시청 겸 시의회 건물에는 소비에트의 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 나는 그곳을 뒤로 하고 드디어 마지막 횡단열차에 올랐다.
 
예카테린부르크 시청 겸 시의회 건물. 소련 시절의 별과 낫, 망치가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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