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 IAEA) 사무총장. (사진=뉴시스)
국제 사회에서 '북한 비핵화 회의론'과 '북한 핵 용인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각) <AP통신> 인터뷰에서 2006년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된 이후 국제사회의 대화 시도가 없었고, 이후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대폭 확대됐다"면서 "북한과 대화를 중단한 것이 조금이라도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했는지 의문이며 오히려 상황을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IAEA 사무총장이 북한 핵보유 인정?…국제적 파문으로 번져
그는 지난달 13일 북한이 처음으로 고농축 우라늄 생산 시설을 공개한 것에 대해, "북한은 국제 핵 안전 기준이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 없는 광대한 핵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뒤 북한이 핵탄두를 30~50개 보유하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라고 주문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다년간 나의 신조는 항상 개입하고 대화를 시도하자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항상 상황을 앞서 주도하고 대화를 위한 문을 열어야 한다"면서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의 대화를 주문했으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장려하고 군사적 이용을 막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인 IAEA의 수장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큰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프레드릭 달 IAEA 대변인이 그 다음 날 바로 "그로시 사무총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의 타당성을 재차 강조하며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라며 "사무총장의 최신 보고서 제36항을 포함한 내용 전반을 참조해달라"고 해명하기도 했는데요. 그가 말한 '36항'은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의무를 준수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IAEA와 신속히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로시 사무총장이 북한 핵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대화를 촉구한 것이라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P-5) 일원인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북한 핵보유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북한에 적용되는 '비핵화'라는 용어 자체가 모든 의미를 잃었다. 우리에게 이것은 종결된 문제(closed issue)"라고 규정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19일 북한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한 후 협정서를 들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러시아는 "북한 핵 인정" 명확…유엔·IAEA 제재도 반대
그는 북한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무분별한 제재에 강력히 반대한다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북핵 결의안에 대해서도 거부한다고 했는데요. 라브로프 장관의 이 같은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 언론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고 말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어 지난 6월 북한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과정에서 유엔 안보리 등의 대북 제재 반대, 평화적 원자력 이용(10조) 등에 합의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러시아는 또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이행을 감시하는 전문가위원회의 활동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의 이 같은 행동을 적극 비판하는 미국에서도 북한 비핵화 회의론이 커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 11월 5일(현지시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난 8월 공화당과 민주당이 발표한 정강정책에서 '북한 비핵화' 문구를 뺀 겁니다. 이는 차기 미국 정부가 북한과 핵군축 협상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예상과 연결됩니다.
'트럼프 2기'가 현실화할 경우 외교·안보 라인 유력인사로 점쳐지는 크리스토퍼 밀러 전 국방장관 직무대행이 미국 일각에서 제기된 북미 핵군축협상론에 대해 "나는 ‘왜 안 되느냐(Why not)?'라는 의견에 찬성하는 편"이라고 했고,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도 핵군축협상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김정은은 트럼프의 리더십 아래 강력해진 미국과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현재 바이든정부에서도 유사한 언급이 나온 바 있습니다. 올해 3월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대양주 담당 선임보좌관이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전제를 두면서도 "이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곧 이어 그의 상관이자 사실상 바이든정부의 북핵 문제 담당 실무책임자였던 정 박 국무부 대북고위관리(현재는 퇴직)가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과정에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비핵화는 하룻밤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11월 미국 대선이 북·미 간 핵 대화 분기점 예상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라는 표현이 북핵 인정을 전제로 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지난달 19일에는 미국 공화당 쪽 인사인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도 “비핵화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단계는 조치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며 "누군가는 비핵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위험 감소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북한 핵 용인론이나 북미 핵군축협상론이 실제 북·미 간 협상으로 이어질 것인지 또 이와 맞물려 한국 핵무장론으로 파생될지 여부는 일단 11월 미국 대선이 모멘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핵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어려운 국면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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