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주주권 행사 현실화? 재계 “악몽”
입력 : 2012-09-19 12:16:42 수정 : 2012-09-19 12:36:20
[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국민연금의 10대그룹 지분율이 사상 처음으로 4%를 넘어서면서 주주권 행사 현실화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정치권이 약속대로 입법화로 뒷받침할 경우 기존 총수의 경영권 행사에 큰 제약이 될 전망이다. 재벌그룹으로서는 악몽인 셈이다.
 
19일 재벌닷컴에 따르면 자산 기준 국내 10대그룹 상장사 93개사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6월말 현재 평균 4.14%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3.66%)에 비해 0.48%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10대그룹 중 한화(000880)그룹을 제외한 9개 그룹의 지분이 늘었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이 5.28%에서 6.00%로, 2위 현대차(005380)그룹이 4.97%에서 6.53%로 대폭 확대됐다. SK(003600)그룹(4.95%), 현대중공업(009540)그룹(5.55%), 한진(002320)그룹(5.00%) 등 5개 그룹은 국민연금이 보유한 10대그룹 지분 평균치 4.14%를 크게 상회했다.
 
특히 핵심 계열사에 대한 매집이 두드러졌다. 삼성전자(005930)(6.69%), 현대차(6.75%) 등 시가총액 최상위 종목의 경우 국민연금 지분율은 평균 5.23%에 달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10대그룹 상장사도 지난해 43개사에서 올해 48개사로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 10대그룹 총수 일가 지분율은 2.08%에서 1.98%로 0.1%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국민연금 지분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10대그룹 지분 늘리기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이란 데 있다. 연기금의 특성상 비교적 안정 자산인 대형 우량주를 선호하는데다 국민연금의 규모 또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6월말 기준으로 일본의 공적연금(GPIF), 노르웨이의 글로벌펀드연금(GPFG), 네덜란드의 공적연금(ABP)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를 자랑한다. 이마저도 이달 말이면 네덜란드의 공적연금을 추월할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총액 380조원을 돌파하면서 세계 3위 연기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게 정부 측 설명이다.
 
국민연금이 빠르게 덩치를 키우면서 그에 걸맞은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정치권이다.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6월24일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대기업에 대해 주주권 및 사외이사추천권 행사를 의무화하는 곳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가 박근혜 대선후보의 최측근이란 점을 감안할 때 당론화 과정까지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민주통합당 역시 당내 경제민주화실천TF를 중심으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내용으로 하는 입법안을 준비 중에 있다. 경제민주화, 특히 재벌개혁을 올 대선 화두로 설정한 점을 들어 새누리당보다 강도 높은 개혁안을 내놓을 것이란 게 TF 측 설명이다. 문재인 대선후보 또한 연일 재벌개혁 의지를 천명하며 힘을 싣고 있다.
 
정치권은 이외에도 국민연금의 대기업 지분 확대에 장애가 되고 있는 이른바 ‘10%룰’을 걷어치우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10%룰은 기관 및 개인이 특정 기업의 지분을 10% 이상 보유할 경우 단 1주라도 지분 변동이 생기면 해당 내역을 5일 이내 공시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금융위는 공시 기한을 분기말 이후 40일까지 완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지난 6월 국회에 제출해 놓은 상황이다. 해당 상임위인 정무위 또한 긍정적 입장을 내보이며 검토에 착수했다. 무난히 합의에 이르지 않겠느냐는 게 정무위 관계자 설명이다.
 
여야가 이례적으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재계가 느끼는 압박감은 한층 커졌다. 재계는 지난해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점화시키자 강력 반발하며 저항 전선을 꾸렸다. 전경련 등 경제5단체를 중심으로 '관치경제', '경영간섭', '시장주의 훼손', '재벌 길들이기' 등의 논리를 펴며 맞섰다.
 
그러나 이주영, 정두언 등 여권 핵심인사들이 동조하고 나서자 한발 물러서며 사태 진화에 매진하는 모습이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 했던 논란은 4·11 총선을 전후로 재점화됐다. 경제민주화가 시대과제로 떠오르면서 재벌 총수의 경영권 남용을 제한할 제도화 수단의 필요성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재계 입장에서는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등 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권의 법제화 칼날에 이어 구체적 수단으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마저 그 가능성이 높아지자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불똥이 튀일까 노심초사하며 다들 말을 아꼈다. 한 그룹사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악몽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뿐이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이 막대한 지분을 갖고도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권리포기이자 국민에 대한 의무 위반”이라며 “이미 주요 출자자가 된 만큼 주주권을 적극 행사해 국민과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지분 5% 이상이면 사외이사 파견, 장부 열람권 등 많은 권한이 주어진다”며 “국민연금이 재벌 경영에 대한 견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이 제 역할을 하면 재벌 총수의 독단적 경영 등을 상당히 견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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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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