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16화)"살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한국전쟁 속의 예술가들 - 구상과 이중섭
입력 : 2016-04-25 06:00:00 수정 : 2016-04-25 08:45:36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가 말하듯이 ‘실존’이 ‘한계상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때, 그 한계상황의 대표격인 ‘죽음’이 그것에 대한 성찰이나 준비의 시간도 주지 않고 포탄처럼 쏟아져 내릴 때, 그러한 전쟁의 광포가 야기한 폐허 속에서 예술가들의 감수성은 아마도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게다가 그 전쟁이 외국들에 의해 주도된 동족 간의 싸움일 때 상흔은 더 크리라. 이데올로기 투쟁에 예술혼이 잠식되던 시기, 한반도에 실존주의가 피상적으로 수입되고 변형되어 전염병처럼 번진 것도 의아한 일은 아니다.  
 
원산 시절의 구상과 이중섭 
  
고은 시인이 쓴 <이중섭 평전>(1973)에 많이 나오는 이름 중의 하나가 바로 시인 구상(1919-2004)이다.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1923년 가족과 함께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원산시 근교)로 이주해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 부농의 집안에서 유복자로 출생해 외갓집이 있던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을 졸업한다. 민족교육의 산실이던 오산학교에서의 교육과 경험은 이중섭에게 조선인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가족들이 이사한 원산에서 1년간 머물다가 1935년 이중섭 역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처음에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곧 자유로운 분위기의 동경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기게 된다.
  
구상과 이중섭은 1939년 일본에서 처음 만났고 1940년 방학 때 원산에 다니러 갔다가 다시 만나 마음을 터놓게 되는데, 본격적인 교류는 졸업 후 둘 다 원산으로 돌아와서 이뤄졌다. 한편 이중섭이 문화학원에서 사귀던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이던 1945년 임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온다. 둘은 원산에서 결혼을 하고 이듬해 첫 아들을 얻지만 디프테리아로 잃고 만다. 이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중섭의 심정을 함께 나눈 사람이 다음의 시에 등장하는 친구 구상이다.
 
고은 시인이 보관한 이중섭 화백 사진. 사진/고은재단
  
"해방 뒤 원산 / 이중섭의 아이가 죽었다 / 이중섭은 / 친구와 함께 / 시미즈 골목에서 술을 잔뜩 마셨다 / 5전짜리 동전 하나면 / 키스 한번 할 수 있는 술집이었다 / … // 집으로 왔다 / 아이 시체가 홑이불에 덮여 있다 / 이중섭은 아내더러 / 옷을 벗으라 했다 / 알몸의 아내를 가운데 두고 / 두 사람이 누웠다 // 밤중에 이중섭이 일어났다 /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 뛰노는 아이 / 물구나무선 아이 / 웃는 아이 / 우는 아이 / 기어다니는 아이 / 서 있는 아이 // 그 그림들을 아이 시체에 매달았다 / 딸랑딸랑 / 쇠방울과 / 아끼던 자기그릇 하나도 매달았다 / 저승에 가서 / 동무들하고 놀라고 // 다음날 아침 아이의 관 / 두 사람이 들고 산으로 갔다 // 전쟁 뒤 / 이중섭은 부산에도 있다가 / 통영에도 있다가 / 바다 건너 / 제주도 서귀포에도 있었다 // 도화지에 아이들을 그렸다 / 게와 / 소라와 / 갈치와 / 도미 / 그리고 바다 위 갈매기도 그렸다 // 게 발가락에 물린 아이 / 갈치에 감긴 아이 // 게였으면 / 소라였으면 / 갈치였으면 / 갈매기였으면"('그림 속의 아이들', 20권).
  
슬픔을 달래는 방법이 보통사람에게는 몹시 기이해 보이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구상 시인에게도 당혹스러웠을 일화이나, 여기에는 이중섭의 모성편집과 그의 아이같은 심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중섭 평전>에 쓰인 고은 시인의 말을 빌린다면 "아들을 잃은 슬픔을 끝까지 내보이지 않고 다른 유희로 여과시"킨 것이다. 죽은 아이가 쓸쓸하지 않도록 밤새 동무들을 만들어 함께 보내주는 그의 심정은 우리에게도 온전히 전달된다.
 
'빨갱이'의 무게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발간한 해방 기념 시집 <응향(凝香)>에 실린 구상의 시들을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이 퇴폐적, 반역사적, 반인민적 등등의 죄목으로 규탄하고 검열단을 파견한다. 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구상은 1947년 2월 원산을 탈출, 월남했다. 시집의 표지 그림으로 군동상(群童像)을 그린 이중섭도 문초를 당했지만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산에서 그의 예술은 점점 수모를 당하게 되고 전쟁이 격화되자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이중섭은 아내, 두 아들, 장조카와 함께 월남한다. 부산에서의 피난시절 이후 제주에서의 생활은 위의 시 마지막 행들에 나타나는 바와 같다. 그는 아들 태현, 태성을 업고 게를 잡아 삶아먹거나 그 게들과 아이들을 그린다. 그러나 아내 남덕의 위장 질환을 조개껍데기를 빻은 가루로 치료하는 극빈한 생활 끝에 만 7개월 동안의 서귀포 생활을 정리하고 1951년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간다. 1952년 일본인 수용소에 머물던 아내와 두 아들은 송환선을 타고 일본의 친정으로 가게 되고 이중섭은 1953년 선원증을 마련해 단 5일간 일본의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귀국한다. 
  
이중섭 화백의 은지화. 사진/뉴시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난 속에서, 사람들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던 이중섭의 옆에는 다행히도 구상이 있었다. 다음의 일화는 그림밖에 모르는 천재화가의 유리 같은 영혼이 험악한 시대에 어떻게 잠식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52년 / 대구 향촌동 골목 술집 / 소주 낙동강을 마시고 있었다 / 이중섭이 토했다 / 포대령 이기련이 / 취한 이중섭을 이죽거렸다 / 야 너에게는 프롤레따리아 냄새가 남아 있어! // 이쯤이면 / 너는 빨갱이야 너는 불그스레한 놈이야라는 뜻 // 다음날 술 깬 이중섭 / 프롤레따리아 냄새가 떠올랐다 / 다음날도 / 다음날도 떠올랐다 / 온몸 죄어들었다 // 대구경찰서 사찰과장을 찾아갔다 //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 과장님이 증명해주시오 // 친구 구상이 와 그를 데려갔다 / 세상 도처에서 빨갱이 피해의식이 생겨났다 / 누군가가 / 너는 빨갱이다라고 말하면 끝장 / … / 그런 시대가 한 가냘픈 화원의 공포였다 //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이중섭', 20권).
 
모두와 소통하는 영혼
  
구상의 활동과 인간관계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작가를 지원해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으로 있었고, 1953년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엉뚱한 이유를 갖다 붙인 정권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15년형을 구형받고 무죄 아니면 사형을 요구하던 그는 결국 무죄로 석방된다. 구상은 5·16쿠데타 이전에 박정희를 알게 되어 그가 관에 나가자 '박첨지'라 부르는 수십 년 지기 친구로 남은 한편, 그 '박첨지'가 70년대에 잡아넣은 김지하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문서를 선우휘와 제출해 서면증언을 했다. 그는 문인들, 화가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모두를 포용하는 넉넉한 인물이었던 듯싶다. 
  
"전쟁 3년을 위하여 그는 존재한다 / 후퇴의 대전 / 후퇴의 대구에서 / 그는 존재한다 // 이중섭을 살피고 / 오상순을 살피고 / 서정주를 살폈다 / 또 누구를 살폈다 / 살피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 대구 말대가리집 / 석류나무집 감나무집 / 언제나 그의 웃음소리가 찬란하다 // 누구보다 먼저 최전방에 그가 존재한다 / 인천상륙 당시 / 9월 15일 / 그는 인천의 한 인쇄소를 찾아가 / 국방부 전단 「승리」를 / 『승리일보』라고 바꿔 발행 / 전선에서 창간한다 // ‘UN군 드디어 한반도 통일로!’ / … / 이런 제목이 전선의 『승리일보』를 메웠다 // 아직 수복되지 않은 서울에 뿌렸다 / 미군 수송기 타고서 / 적의 대공포화 무릅쓰고 뿌렸다 // 9월 21일 / 그는 유엔군과 국군 해병 / 국군 육군과 함께 / 선발대로 경인가도를 달렸다 / 서울 입성 // 그는 문관인데 구소령 구소령이라 불렸다 / 9월 21일 / 모든 사람들이 서울 수복을 믿지 않을 때 / 수복된 서울거리에 그가 맨 먼저 존재한다 // 오늘도 그는 전선에서 후방의 술집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 모든 부재 속에서 / 적군의 무덤 앞에서"('구상', 20권).
  
구상이 지병인 폐결핵으로 병상에 있을 때, 이중섭은 무슨 병이든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와 아이가 그려진 그림을 주면서 그걸 먹고 빨리 나으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웃고, 구상은 친구의 그 천진한 모습을 깊은 우정으로 마음에 심었다. 이중섭이 왜관의 구상의 집에 머물 때 그린 <K시인의 가족>(1955년)은 구상의 가족을 향한 이중섭의 애정과 일본의 자기 처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혼재되어 보인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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