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건설과 파괴, 가라앉고 발견되는 선사의 기록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⑩)
입력 : 2024-01-28 06:00:00 수정 : 2024-02-03 22:04:11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암각화 방문자를 위한 정보
 
벨로모르스크에서 택시를 타고 암각화 박물관을 가자고 하면 아마도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이라 불리는 전시관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미리 연락했던 박물관이 전시관 건물과 같은 곳인 줄 알았던 이유는 명칭상 혼란이 있었기 때문인데 정리하자면 이렇다. 암각화 박물관인 지역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벨로모르스키군 향토박물관백해 암각화로 벨로모르스크 시내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암각화를 볼 수 없다. 대신 향토박물관이기 때문에 포모르(백해와 북극해 연안에서 어업 활동에 종사해 온 민족지 집단)의 땅인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어 꼭 방문할 만하다. 백해 암각화를 보려면 향토박물관에 속하지만 도시의 외곽에 있는 전시관과 야외 암각화 구역으로 가야 한다. 향토박물관에서 전시관까지는 약 11km기 때문에 시내에서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방문할 수 있는 거리지만, 나는 암각화를 찬찬히 살펴보기 위해 박물관 측의 조언대로 전시관에서 가까운 비고스트로프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암각화를 보존한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오른쪽 건물) 옆, 도로 왼쪽에 보이는 구조물 아래에 댐의 수문이 있다. 사진=박성현
 
미리 연락했던 박물관이 암각화 전시관과 다른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자 박물관 측에 전화를 걸었다. “, 그쪽으로 가셨군요! 동료들에게 연락해 어떻게 할지 곧 알려 드릴게요.” 시내 박물관에서 나를 기다리던 큐레이터 이리나 씨가 말했다. 원래의 계획은 박물관 담당자를 만나 그간의 메일 협조에 감사하고 정보와 조언을 구한 후 답사를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암각화 장소에 와 있는데 다시 시내의 박물관으로 갔다가 오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이리나 씨를 통해 파악한 바는 이랬다. 나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박물관 관장은 휴가 중이고 견학 담당자인 도슨트 류드밀라 씨는 암각화 현장에서 그룹을 안내하고 있다 했다. 그래서 오늘 휴무일이라 출근하지 않은 동료 마리나 씨에게 급히 연락해 나를 안내해 주도록 부탁하겠다는 것이다. 마리나 씨는 어린이교육담당 학예사인데 암각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리나 씨의 부탁을 받은 그녀는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달려와 주기로 했다. 벨로모르스크는 정말 친절의 연속이다.
 
백해 암각화 발견의 역사
 
전시관 로비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데 야외 암각화 안내를 끝내고 돌아온 류드밀라 씨가 내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마리나 씨가 20분쯤 후에 도착하실 거예요. 그동안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기다리시겠어요? 저는 또 그룹 안내를 가야 해서…” 오네가호수 암각화도 그렇지만 백해 암각화도 기후로 인해 5월 말에서 9월 중순 정도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여름에 관람객들이 몰린다. ,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은 실내 전시관이므로 사계절 어느 때나 관람이 가능하다. 박물관에 투어를 신청한 그룹들을 안내하느라 하루에도 수차례 숲속을 오가는 그녀는 몹시 바쁘고 지쳐 보였다. 나는 전시관의 암각화를 둘러보면서 나를 안내해 줄 마리나 씨를 기다리기로 했다.
 
1926년 당시 학생이던 리넵스키에게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를 보여준 비고스트로프 마을 주민 마트로소프(좌)와 고고학자 리넵스키(우). 사진=벨로모르스키군 향토박물관 '백해 암각화'
 
백해 암각화는 비그강이 백해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6~8km 떨어진 비그강 하류의 여러 섬에 산재해 있다. 전시관의 이름인베소비(악마의) 슬레드키(발자국, 흔적)’는 백해 암각화군 중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지점이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최초 발견자는 고고학자이자 민족지학자 겸 작가인 리넵스키로 알려져 있는데 자초지종은 이렇다. 1926년 아직 학생이던 그가 카렐리야 민족지학 탐험에 참여했을 때 비고스트로프 마을주민인 마트로소프가 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쇼이룩신섬 북부로 그를 데려가 많은 바위그림을 보여주었다. 쇼이룩샤라 불리는 급류 근처에 위치한 이 300개 이상의 형상들은 그렇게 마을주민들에게만 알려져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 이후 리넵스키는 백해 암각화에 대한 연구와 학술서 출판뿐만 아니라 이를 모티프로 한 소설 『돌책의 낱장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3~1968년 발굴 당시 사바테예프가 찍은 사진. 사진은 로바노바의 아카이브에서 벨로모르스크 향토박물관 직원 베르보프가 편집.
 
베소비슬레드키 이후 백해 암각화의 발견 역사는 이 지역의 산업인프라 구축과정과 관련돼 있다. 먼저 백해-발트해 운하가 1931년 말 건설되기 시작해 1933년 완공됐다. 1936년에는 비그강 하구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로 인해 고고학자 라브도니카스가 이끄는 탐사단이 긴급히 조사에 착수해 많은 바위그림을 발굴하고 약 600개의 이미지들을 정리하게 된다. 이때 발견된 것이 예르핀푸다스섬의 작은 암각화그룹 두 개(예르핀푸다스 1 2), 베소비슬레드키에서 북동쪽으로 1.5km에 위치한 볼쇼이말리닌섬의 커다란 암각화그룹 스타라야()잘라브루가, 그리고 베소비슬레드키에서 남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쇼이룩신섬 남부의 작은 암각화그룹이다.
 
백해 암각화 연구에 공헌한 사바테예프(좌)와 리넵스키(우)의 1960년대 모습. 사진=카렐리야공화국 국립문서보관소.
 
암각화 지역에 비고스트롭스카야 수력발전소(1959~1961)와 벨로모르스카야 수력발전소(1961~1964)가 건설되자, 댐 가까이에 놓여 위험에 처한 암각화를 보호하기 위해 바위 위에 그대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낡고 파손돼 1999년 폐쇄되고 만다. 현재의 파빌리온은 그것을 허물고 새로 건축해 2021년에 개관된 전시관이다. 수력발전소 건설에 대응하기 위해 1963~1968년 사이 고고학자 사바테예프의 지휘 아래 집중적인 현장조사와 발굴작업이 이뤄졌다. 이때 노바야(잘라브루가의 대규모 암각화그룹과 예르핀푸다스 3, 이름없는 섬들의 바위그림을 발견해 총 1,300개 이상의 이미지들을 기록하게 된다. 비그강 하구의 암각화는 2000년대 이후에도 예르핀푸다스 4지구 등 새로운 이미지들이 추가돼 현재는 11개 그룹, 3,400여 점의 형상으로 보고되고 있다.
 
새로 건축된 파빌리온 안에 보호, 전시되는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일부 모습. 사진=박성현

1936년 베소비슬레드키를 발굴할 당시의 사진을 마리나 씨가 바로 그 장소를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멀리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 오른쪽이 댐이 있는 곳이다. 사진=박성현
 
암각화로 가는 숲길과 바위섬 정경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 면해 있는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은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세련된 현대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는 이 흰색 또는 회색의 전시관 뒤편으로 비그강과 수많은 돌, 바위섬들이 펼쳐져 있다. 전시관 옆으로 도로 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조물 아래에는 댐 수문이 있다. 전시관은 2층 건물로, 입구가 있는 위층에서는 백해 암각화를 설명하는 전시물과 영상을 볼 수 있고 아래층에는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가 원래 있던 위치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거대한 바위에는 엘크와 순록, 벨루가와 고래사냥을 하는 배, 고니와악마등 수많은 형상이 정교하고 촘촘하게 새겨져 있어 연신 감탄하면서 보는데, 나를 안내해 줄 마리나 씨가 도착해 다가온다. 실내에 있는 베소비슬레드키는 혼자서도 관찰할 수 있으니 다음날 다시 와서 찬찬히 보기로 하고 마리나 씨를 따라나섰다.
 
암각화로 가는 도중 도로 반대편에서 보이는 전경으로 비그강의 물이 빠져 있다. 왼쪽에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 오른쪽에 도로 위 구조물과 그 아래 댐의 수문이 보인다. 사진=박성현
 
비그강의 암각화군은 베소비슬레드키, 잘라브루가, 예르핀푸다스, 졸로테츠, ‘이름 없는 작은 섬들로 나뉘는데, 관람객이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은 베소비슬레드키와 잘라브루가 그리고 예르핀푸다스의 일부다. 나머지는 물에 잠기거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고 발굴에 참여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정확한 지점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비그강 하류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암각화 주위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강바닥의 물이 빠져 사람들이 섬 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반면 급류 쇼이룩샤는 사라졌다. 베소비슬레드키의 남쪽 부분인 쇼이룩신섬의 작은 암각화 그룹도 댐이 건설될 당시 공사 중에 묻혀버렸다.
 
20세기 들어 인간 활동의 영향으로 암각화 지역의 자연경관이 인위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사실 비그강 하류는 자연적인 지질환경의 변화를 겪어온 곳이다. 이곳은 북부 타이가 하위 지역으로, 백해의 해안 침식과 퇴적이 일어나 해안이 주로 계단식 늪지대 유형의 풍경을 이룬다. 수천 년 전 암각화가 제작될 당시 이곳의 자연조건은 현재와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숲속 생태산책로로 들어섰다. 잘라브루가까지 2km가량 걸어가야 하는데 숲길이라 40분 정도 걸린다 한다. 한쪽엔 숲이, 다른 한쪽엔 드러난 강바닥 위로 돌무더기들이 보이거나 군데군데 얕게 찰랑이는 강물 위에 바위섬들이 떠 있다. 그 정경이 고요하고 그윽하다.
 
야외 암각화 구역으로 가는 도중 만나게 되는 비그강과 바위 풍경.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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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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