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내가 악마라고?”-베소비슬레드키(악마의 발자국)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⑮)
입력 : 2024-03-11 06:00:00 수정 : 2024-03-11 08:38:47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시 찾은 전시관, 다시 만난 친절
 
백해 암각화 중 제일 먼저 발견된 베소비슬레드키는 다른 암각화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실내에 보호되고 있다. 1960년대 두 개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자, 댐 가까이에 있어 위험에 처하게 된 암각화를 보호하기 위해 그 위치에 그대로 건물을 지어 올린 것이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이다. 1968년에 처음 세워졌던 파빌리온은 파손되고 낡아져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 1999년에 폐쇄된 후 한동안 방치됐었다. 현재의 파빌리온은 그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어 2021년에 개관된 새 전시관 겸 보호관이다(본 연재 10회 참고). 나는 첫날 장장 7시간에 걸쳐 야외 암각화를 안내해 준 마리나 교육연구사 덕분에 예르핀푸다스 일부와 잘라브루가를 잘 관찰했지만, 베소비슬레드키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봤을 뿐이어서 다음날 다시 꼼꼼히 살펴볼 참이었다. 
 
철거되기 전 옛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의 모습. 사다리가 보이는 출입구에서 층계를 내려가면 암각화가 있다. 2017년 11월 10일. 사진=베르보프(A. Verbov,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숙소인 비고스트로프 마을의 야영장에서 파빌리온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로 가깝고 한번 갔던 길이니 쉽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도중에 작은 변수가 생겼다. 비고스트로프 마을을 구경하면서 가다가 만난 한 주민과 대화가 길어져 그녀의 집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귀촌생활을 한다는 스베따 씨의 거실에는 러시아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인 정교의 성상화가 소련 시절의 작은 깃발과 함께 놓여 있어 흥미롭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승전기념일(5월 9일) 깃발이다. 마당에는 러시아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러시아식 사우나 목욕탕인 ‘바냐’가 따로 있다. 암각화와 같은 문화 유적을 볼 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후 곳곳에서 보게 된 백해 지역민들의 낚시 현장도 암각화 속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비고스트로프 마을 주민 스베따 씨의 집 안뜰. 사진=박성현
 
한참 얘기를 나눈 후 스베따 씨는 직접 잡아 말린 생선과 텃밭에서 재배한 대파를 선물로 주려 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했지만 정성어린 선물을 거절하기 어려워 감사히 받았다. 생선과 대파를 들고 암각화를 볼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숙소에 들러 두고 오느라 일정이 늦어진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아뿔사, 허둥대다 마을 초입에서 암각화 전시관 방향과는 반대로 길을 잡는 바람에 엉뚱한 도로에서 헤매게 됐다. 자동차만 쌩쌩 달린다. 이미 너무 와버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싶은 마음에 손을 드니 다행히 몇 번 만에 승용차 한 대가 앞에 와서 멈춰 준다! 고마운 커플이다. 가던 방향의 반대로 일부러 길을 돌아 낯선 이를 파빌리온 앞까지 데려다 준 친절한 그들에게 백해 암각화를 꼭 보라고 권한 후 드디어 다시 전시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베소비슬레드키, 발자국을 남긴 자는 누구? 
 
베소비슬레드키의 뜻은 ‘악마의(베소비) 발자국(슬레드키)’이다. 원래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표현인 초르토비슬레드키였는데, 1926년 이 바위그림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리넵스키가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베소프노스(악마의 곶) 이름에 맞추어 바꾸었다고 한다. 비고스트로프 마을주민 마트로소프가 리넵스키에게 이 놀라운 그림들을 보여 주기 위해 그를 안내했을 때 그들은 배를 타고 비그강의 쇼이룩신섬에 도착했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는 이 섬의 북부와 남부에 위치하는데, 남쪽의 그룹은 수력발전소의 댐을 건설할 때 묻혔고 북쪽그룹이 현재 파빌리온 안에 보호되는 바위그림이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남쪽의 그림에는 많은 벨루가(흰고래)들이 묘사돼 있었다.  
 
비고스트롭스카야 수력발전소(멀리 보이는 건물)의 댐 수문이 있는 곳으로,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남쪽그룹은 댐으로 인해 묻혀졌다. 2017년 11월 10일 모습. 사진=베르보프(A. Verbov,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새로 건축된 파빌리온 안에 보호, 전시된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를 방문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사진=박성현
 
그런데 ‘악마의 발자국’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걸까? 북쪽그룹은 거대한 암석의 약 40여 제곱미터 면적에 새겨져 있는데, 연구 초창기인 30년대에는 약 300개의 이미지가 기록됐다가 현재는 둥근 점, 줄무늬 등 단순한 형상들도 발굴해 총 500개가량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순록, 엘크, 때때로 곰과 여우의 숲동물과 벨루가고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 연어 등의 해양동물, 고니를 비롯한 물새, 별과 십자모양, 사람이 타거나 타지 않은 많은 배들, 작살을 던져 사냥하는 사람, 스키를 탄 사람, 점과 선, 줄무늬, 삼각형, 타원 등 상징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가 포함된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독특한 이미지가 발자국으로, 누군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여덟 개의 발자국이 바위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관람객이 바라볼 때 바위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진행되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게 된다. 발자국을 계속 따라가면 그 끝에 이른바 ‘악마’라는 별명이 붙여진 한 의인화 형상이 옆모습으로 서 있다. 바로 이 1미터 키의 인물과 그의 발자국으로부터 베소비슬레드키, 즉 ‘악마의 발자국’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일부. 다양한 형상들 사이로 '악마'의 발자국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박성현
 
하지만 ‘악마’라니… 후손들이 붙여준 이름이 그로서는 억울할 법하다. 암각화의 창작자가 누구를 묘사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오네가호수의 베소프노스(악마곶)에 새겨진 의인화 형상이 정교 신앙의 신봉자들에 의해 훼손되고 ‘악마’라는 부당한 이름을 받았던 것처럼, 백해의 인물도 그의 형상에 두려움을 느낀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유사한 이름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달리 크게 강조된 발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비범한 존재임을 암시한 것일까? 그는 팔꿈치를 살짝 구부린 채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자기 머리의 두 세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발을 뻗고 있다. 머리 뒤쪽에는 혹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머리장식(또는 귀?) 같은 것이 보이고 등도 둥글게 튀어나왔으며 연구자들이 거대한 남근으로 해석하는 돌출부를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굴곡 있게 입체적으로 표현된 신체에서 근육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큰 발의 한쪽 다리로 서서 한 팔을 들고 있는 독특한 자세가 샤먼의 의례 행위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일명 '악마'로 불리는 의인화 형상. 중앙 하단. 사진=박성현
 
그가 걸어가면서 남긴 발자국들 사이로 육지와 바다의 다양한 동물들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배를 타고 사냥을 한다. 아마도 이 신비로운 인물은 한때 이곳의 주민이었던 선사집단의 영적·정신적 지도자였거나 신적 존재로 추앙받던 상징적 인물일 수 있다. 지금은 수력발전소의 댐으로 인해 주위경관이 바뀌었지만 바위가 있던 공간은 급류가 오가고 수위 변동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기도 가라앉기도 하는 독특한 곳이었다. 연구자들의 추측대로 만약 이 바위가 신성한 공간인 제의 장소에 놓여 있었다면, 그래서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그림들이 사냥의 성공, 풍요와 다산 등 당시 주민들의 염원과 일상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묘사한 것이었다면 발자국의 주인공은 그 제의를 주관하던 제사장이나 샤먼이었을 수도, 혹은 그런 염원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신화적 존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일부. 벨루가(흰고래)를 사냥하는 사람, 엘크, 별, 고니 등 다양한 형상이 새겨져 있다. 사진=박성현
 
오네가호수에서 온 고니들?
 
베소비슬레드키 암면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들 중에는 백해 암각화의 특징인 고래도 있지만 두 마리의 우아한 고니가 돋보인다. 그중 하나는 상당히 큰 크기로, 긴 목과 곡선으로 굽어진 두 발을 드러내고 있다. 온전한 모습의 이 두 마리 외에도, 또 다른 큰 고니가 보이는데 머리가 ‘악마’의 마지막 발자국에 눌려 있어 의문을 자아낸다. 오네가호수 암각화 전체 표현물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물새 중 대표적인 게 고니고 백해 암각화에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고니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묘사 방식이 오네가호수의 고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베소비슬레드키 암각화의 일부.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고니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고니가 새겨져 있다. 사진=박성현
 
오네가호수와 백해 암각화 사이에는 그 밖에도 유사한 이미지들이 있다. 지난번에 구잘라브루가의 ‘흑샤먼’을 소개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그의 손 옆에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 아마도 의례용 도구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것은 오네가호수 암각화에서 자주 보이던 태양의 상징 기호와 닮아 있다. 또한, 오네가호수 암각화에서 드물게 보이던 나무 모양의 이미지가 백해 암각화에서도 드물게 나타나 흥미롭다. 양쪽의 유적지에서 같은 문화층의 신석기 토기들이 출토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두 지역에 거주하던 집단들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새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사냥꾼. 머리 위로는 커다란 엘크가 보이고 앞에는 긴 꼬리를 가진 사슴과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형상이 있다.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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