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정원 증원으로 인한 정부와 의료계 갈등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 이후 의료공백 사태는 7개월째 계속되는 상황입니다.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이 제안됐지만, 책임공방만 이어지고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그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환자와 일반 시민들, 그리고 힘겹게 의료현장을 지키고 있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토마토Pick에서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중심으로 현 의료공백 사태를 짚어봤습니다.
여야의정 협의체 제안
기대감이 실망으로
추석을 앞두고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나와 기대감을 모았습니다. 의료대란을 막고 의정 갈등 해소를 위해 논의 당사자들이 직접 모일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양보 없는 극한대립만 : 하지만 협의체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정부와 여야, 의료계 모두 협의체 가동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각자의 조건을 달고 날선 책임공방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대란 책임이 전공의에게 있냐 대통령과 정부에 있냐, 2025년 의대 증원 조정을 의제에 올려야 하냐 배제해야 하냐, 대통령 사과와 책임자 문책이 선결돼야 하냐 아니냐, 의사단체 일부만 참여해도 출범해야 하냐 등등 온통 날 선 공방과 대립 뿐입니다. 보건의료노조는 “여야의정 모두 지난 7개월간 전제조건을 달고 극한대결을 이어왔기 때문에 해법 모색을 위한 대화가 한 차례도 마련되지 못했다”며 “이전과 같이 책임공방만 펼친다면 협의체는 구성조차 힘들다는 것이 너무 명확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윤-한 갈등'에 해법 실종 : 최근 다시 고조되고 있는 '윤-한 갈등'도 협의체 구성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협의체 구성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주도하고 있고, 협의체 구성에 필요한 협상안의 키는 대통령실이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임과 권한이 있는 두 핵심 주체가 대화도 하지 않고, 남보다 못한 사이로 벌어지고 말았으니 의-정 갈등 자체가 풀릴 리 없는 것이죠. 추석 연휴는 간신히 넘겼다고 해도, 현장에서는 이런 상태가 유지되면 의료대란은 시간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병원들 비상경영 돌입
피해는 노동자들에 전가”
의정 갈등으로 인한 의료현장 파행의 틈파구니에서 수많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의료기사, 요양보호사 등 60여개 직종이 속해 있는 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의료공백 장기화 사태로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의사들의 집단 진료거부와 집단 휴진으로 인한 병원 경영위기 책임이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겁니다.
-실직과 임금삭감 고통 : 무급휴가·휴직 강요와 연차휴가 사용 강제, 시간외근무 자제, 근무시간 단축, 결원 미충원, 인력 재배치 등은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임금삭감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은 계약만료와 동시에 일자리를 잃는 고통을 겪고 있고, 신규간호사들은 언제 채용될지 모른 채 대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의사인력 공백을 메우고 있는 진료지원(PA) 간호사들은 업무량이 늘고 불법의료 책임과 의료사고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는 게 노조의 주장입니다.
-병원들 일제히 비상경영 :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로 의료공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난 5월 보건의료노조가 실시한 의료현장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공의 이탈로 인해 비상경영을 선포한 의료기관은 총 52곳이었습니다.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 47곳 중 비상경영을 선포한 곳만 35곳입니다. 전체의 74.5%가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하면서 병상과 인력 운영 효율화, 비용 절감에 나섰습니다.
-신동훈 의료연대본부 제주대병원분회장 : “제주대학교병원은 수술건수가 하루 평균 12건 이상 감소하고 병상가동률은 70% 전후에서 40%대까지 하락하면서 올해 재정적자만 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병원 측에서는 비용절감을 위해 이미 보직자 등 법인카드 사용을 30% 절감하고 직원 대상 무급휴가를 추진하고 있다.”
-신나리 보건의료노조 전남대병지부장 : “부서운영비 삭감은 물론 업무에 필요한 비품 지급까지도 중단하고,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노사합의도 하지 않은 보상휴가제를 도입했다. 병원 측은 연차사용 강요, 무급휴가 권유 등으로 지출을 줄이고, 퇴직자가 발생해도 올해는 인력 충원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의료 인력 확충하는데…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력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 4대 과제에는 ‘의료인력 확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의정 갈등은 정부가 의료개혁 일환으로 의대정원을 증원하기로 하면서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인력 확충 어디에도 의사를 제외한 나머지 의료인력 확충 계획은 없다는 게 보건의료노조 지적입니다. 의사에 대해서는 전공의 교육·수련 질 제고, 수련환경 개선, 전문의 중심병원 전환 등 인력 양성과 수급, 근무환경 개선, 의료사고 책임 부담 완화까지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간호사와 의료기사 등 의사를 제외한 보건의료인력에 대한 정책은 빠져 있다는 겁니다. PA 간호사 제도화 역시 간호인력 확충 정책이라기보다 의사 부족을 보완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현재도 현장을 지키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의료개혁 논의에는 병원과 의사단체만이 아니라 다양한 직종의 보건의료 노동자들, 환자와 시민단체들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의료개혁이 왜곡된 의료체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의사뿐 아니라 의료계의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형태가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