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내린 '경제민주화'..당청, 재계 제스처에 '후퇴'
입력 : 2013-04-18 11:56:25 수정 : 2013-04-18 13:38:58
[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결국 허언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내걸었던 최대 공약인 경제민주화를 사실상 포기했다.  
 
경제 위기가 빌미를 제공했다. 재계가 신경전 끝에 투자와 고용, 상생 등에 대해 일정 부분 화답하자 박 대통령은 압박을 풀었다. 유착에 다름 아닌 정경의 공생이다.
 
◇朴 "대기업이라고 무조건 때려선 안돼"..대선공약 실종
 
박 대통령은 17일 국회 정무위, 기재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느 한 쪽을 누르고 옥죄는 게 아니다"며 "대기업이란 이유로 벌주는 식의 때리기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누구를 벌주거나 쳐내는 개념으로 다루는 게 경제민주화의 본래 취지는 아니다"고 강조했다고 복수의 참석자들이 전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여당 내에서조차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이 일고 있는 것과 관련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고, 예전보다 상당히 진전된 것"이라고 일축한 뒤 "더 많이 나가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부담이 있으니 잘 조정해 달라"고 당부했다.
 
앞서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기업들의 투자 위축을 우려하며 "경제민주화 관련해서 상임위 차원이기는 하지만 대선 공약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한 것에서 한걸음 더 성큼 내딛은 것이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문희상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7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경제민주화 관련법 개정 작업은 국회 소관"이라며 "박 대통령은 지침내리기식 발언을 삼가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이는 공약 뒤집기가 아닌 시대정신 후퇴"라며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주장했던 경제민주화 공약은 가짜, 위장이었단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과 진보정의당 소속 의원들 모임인 경제민주화포럼은 이날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공약 실천의지를 스스로 퇴색시킨 것은 물론, 국회 입법권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며 청와대의 '가이드라인' 제시로 받아들였다. MB정부 하에서 여당이 거수기로 전락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원색적 비난도 잇달았다.
 
반면 새누리당 지도부의 화답은 적극적이었다. 총대는 이한구 원내대표가 맸다. 그는 박 대통령의 수석비서관회의 발언 내용이 전해진 직후 잇단 공개회의 석상에서 "정치권은 기업인들이 의욕을 꺾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인기 영합적 법률만 먼저 통과되면 경제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17일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는 "지하경제에 대한 제재보다는 예방이 중요하다"며 "(국회에서 논의 중인) FIU(금융정보분석원)법이 불필요하게 소비심리를 자극하거나 (정상적) 재산증식 활동에 지장을 줘서 금융시장 혼란을 가속화하지 않도록 정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권 내 쇄신파로 구성된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의 반발이 뒤따랐다. 남경필 의원은 "경제민주화는 인기 영합적인 것이 아니며 '경제민주화가 경제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은 본질 왜곡"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대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청의 코드 맞추기가 본격화되면서 여야가 논의 중인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 자본시장법, 가맹사업법(프랜차이즈법) 개정안 등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의 4월 임시국회 처리는 불투명해졌다.
 
◇재계 화답에 정부 압박 풀어..물 건너간 재벌개혁
 
이를 두고 시민사회와 정치 평론가들은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4·11 총선에서 재미를 봤던 경제민주화를 대선 국면에 전면 재등장시킴으로써 야권을 향한 중도층의 표를 잠식시키는 정략적 목적 외에 진정성은 없었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대표적 사례가 박 대통령이 비대위원장 시절 끌어들였던 김종인 전 의원을 대선 이후 용도 폐기한 점이다. 이어 지난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5대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 용어가 사라지면서 경제민주화 실종 우려가 현실화됐다.
 
새 정부 출범 직후 검찰과 공정위, 국세청, 노동부, 감사원에 이르기까지 동원 가능한 사정기관을 총동원해 재계를 압박했지만, 이는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노림수였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성과 현대차 등 재계 1, 2위를 다투는 재벌그룹들이 올 초 불확실한 세계 경기를 이유로 투자계획을 발표하지 않자 정부의 압박 강도는 심해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86일간 외유했다. 이 회장이 박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지 않고 해외 체류 기간을 늘리자 삼성이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재계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다 지난 4일 30대 그룹이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지난해 실 투자액보다 7.7% 증액된 149조원의 투자 목표치를 내놓자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건희 회장이 6일 귀국길에 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하면서 "삼성도 열심히 뛰어서 도와 드리겠다"고 말하자 긴장은 완연히 녹아내렸다.
 
여기에다 다음달 박 대통령의 방미 수행단에 이건희, 정몽구, 구본무 회장 등 재계 빅3가 이름을 올리자 여권 내부에서도 "화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재벌개혁보다는 공정한 시장경제 복원으로 경제민주화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투자를 본격화할 수 있도록 규제 정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은 17일 정몽구 회장의 장남 정의선 부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글로비스와 딸 정성이 고문이 경영에 참여하는 이노션으로 독점되던 물류와 광고 사업을 절반 이상 중소기업에 할당하겠다며 국회의 일감 몰아주기 금지 법제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나머지 10대그룹들도 긴박하게 움직이면서 광고·SI·물류·건설 분야 내부거래 비중을 줄이기 위한 대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18일 이 같은 일련의 흐름에 대해 "때려잡기식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경제민주화를 안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경제주체인 기업을 코너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분명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재계가 투자와 고용증대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불공정 행위로 지적받던 행위에서 크게 물러서지 않았느냐"며 "무턱대고 재계와 싸우려 들다간 혼란만 심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초반 압박을 통해 받을 건 받은 만큼 이제 접점 찾기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로 풀이됐다.
 
사실상의 재벌개혁 포기로, 대전제가 사라지면서 경제민주화 역시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남은 것은 정치권력과 시장권력 간의 대화합이다. 자연스레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등 서민과 민생의 설움은 또 다시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방 이후 반세기 넘게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기득권은 여전히 철옹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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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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