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대한민국에 대통령이 없다
입력 : 2013-08-13 10:35:40 수정 : 2013-08-13 13:55:09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
 
지난 2012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헌법을 수호할 책임자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박근혜 당선자는 올해 2월23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식에서 이렇게 선서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같은 선서에 의해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헌법은 대통령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4장 정부편 제1절 제66조는 이렇다. 
 
①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②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④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그런데 이 같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지키는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대통령이 숨어버렸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세제개편안이 갑론을박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현안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논란이 없다면 그게 북한식의 이름만 민주주의를 갖다 붙인 가짜 민주주의 국가일 것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결된 사안이니만큼 온갖 이견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무수한 이견들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대통령은 마치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말한다. 
 
지난 8월8일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이끄는 기획재정부는 월급쟁이들에게 주어졌던 각종 소득공제를 축소하는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정부와 여당은 코너에 몰렸다.
 
그러자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분명히 증세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루이14세 당시 재무장관이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치 거위에게서 고통 없이 털을 뽑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 게 이번 세법 개정안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졸지에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통없이 털이나 뽑히는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거위 신세가 됐다. 여론이 악화되는 건 불문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생긴다. 
 
박 대통령이 지난 1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서민과 중산층의 가벼운 지갑을 다시 얇게 하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 방향과 어긋나는 것”이라며 세제개편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해달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헌법 제66조 ④항에 의하면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기획재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하기까지 박 대통령은 그 내용을 몰랐다는 말인가? 기획재정부가 청와대 재가도 받지 않고 발표했단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청와대와 협의도 하지 않고 발표했다면 굳이 조원동 경제수석이 '거위의 털' 운운할 필요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만 모르고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조원동 경제수석 둘이서 꿍짝짝해서 세제개편안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위기상황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도 모르게 아랫 것들끼리 중차대한 문제를 처리한다면 국기가 문란해도 보통 문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일처리 순서에 의하면 이런 시나리오도 말이 안된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면 세제개편안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대통령도 모르게 일처리를 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을 놓고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말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땅히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사전에 알았던 일을 마치 몰랐다는 식으로 말하는 저 언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박 대통령의 발언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행정부의 수반이 없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소위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번 세제개편안만 그런게 아니다. 
 
서울광장에 촛불을 밝힌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대통령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처럼 치부하고 있다. 
 
오피스텔에 스스로 감금됐던 국정원 댓글녀에 대한 경찰 수사를 사전에 알았느니, 몰랐느니 이걸 따지는게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어디에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취임 선서문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권력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선거에 개입하면 중대한 범죄로 처벌했다. 4.19혁명을 촉발한 3.15부정선거가 그랬다.
 
그런데 국정원 직원이 호남인들을 비하하는 댓글을 달면서 국가를 분열시키는 반국가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는데도, 심지어 이걸 정당한 행위라고 옹호하는 궤변마저 난무하는 상황에서, 지역분열을 막고 국가를 통합할 책무가 있는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이 휴지쪼가리 취급을 받았던 기나긴 역사가 있기는 했다. 문명국 흉내낼려고 장식품처럼 헌법을 만들어놓고 그때 그때 난도질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조차 헌법이 휴지쪼가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문명국가를 지향하며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대한민국에게는 크나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여기,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취임 선서를 한 대통령은 어디에 갔는가? 지금 대한민국에 대통령이 있기나 한건가?
 
권순욱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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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