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24화)서민의 곁을 지킨 것들
“그 술집은 벽이 없다”
입력 : 2019-04-15 06:00:00 수정 : 2019-04-15 06:00:00
선거철에 볼 수 있는 장면들 중 하나가 정치인들의 재래시장 방문이다. 그들은 서민과의 친화력을 과시하기 위해 평소에는 가지도 않을 시장에 가 엉거주춤 서서 떡볶이나 어묵을 한입 먹고 호탕하게 웃는 연출을 한다. 수십 년이 지나도 반복되는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신기할 정도이다. 국민을 대변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것도 그들의 가식 어린 태도만큼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나 평범한 서민들에게 재래시장은 일상의 일부이고 때로는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를 위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재래시장에 북적이는 시민들을 위에서 찍은 모습. 사진/뉴시스
 
재래시장의 풍경
 
한반도에서 전통시장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져 있는 때는 아무래도 조선시대일 것이다. 국사책에서 정조대왕이 1791년(정조 15년)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했다는(육의전 제외) 역사도 배우고, 보부상들이 활약했던 조선시대 5일장이 현대의 지방에도 이어지고 있어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TV사극에서 가끔 재현되는 종로거리 운종가(雲從街)를 보면 실제의 모습이 어땠을지 시간여행으로 가보고 싶기도 하고, 각각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이 된 칠패시장과 이현시장의 시끌벅적했을 당시 모습도 궁금하다.
 
시장은 물건의 매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보교환과 여론이 모이는 곳이었고 군중이 운집하는 공간이라 일제강점기 3·1운동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현대사에서도 시장은 항상 중심에 있었다. 피난민들의 생존 터전이었던 부산의 국제시장과 서울의 남대문시장에 흘러들어온 미군부대 물품과 구호물자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깃들어 있다. 조선 중기를 기원으로 하는 대구의 서문시장은 3·1운동의 발원지였으며 6·25를 계기로 남한 최대의 포목시장으로 성장한 곳이다. 광주의 대인시장과 양동시장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해 나르고 생필품을 지원한 상인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시장,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통시장이 아니어도, 동네마다―아파트촌이 아니라면―작은 재래시장이 하나쯤 있어 주민들의 일상 속에 함께 한다. 1990년대 이래 대형마트의 등장과 홈쇼핑, 인터넷판매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2000년대에 들어서서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 전통시장 상품권 발행·사용과 같은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동네의 재래시장들이 활기를 잃은 상태이지만, 통인시장, 망원시장처럼 TV방송과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몇몇 시장들은 동네 주민들뿐만 아니라 먼 곳에서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오는 가족이나 데이트를 오는 젊은 연인들의 주말 관광 코스가 되기도 한다. 거의 70여 년 전, 해방 전후 군산의 한 장터를 걷고 있는 다음 소년의 모습도 지금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일제시대 울산시의 한 시장 광경. 사진/뉴시스
 
새 장터보다
묵은장에 더 먹을 것 푸짐하다
그러나
빈털터리 아버지 따라간
코맹맹이 상진이
그 많은 먹을 것 그냥 지나간다
침도 못 삼키고
눈만 켜고
이 세상은 절대로
먹고 싶은 것 공짜로 먹을 수 없다
돈 없이 먹을 수 없다
어린 상진이
열두 살에
진리 깨쳤다
< … >
(‘묵은장’, 3권)
 
‘까치담배’와 잔술
 
2015년 1월 담뱃세 인상으로 담뱃값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훌쩍 뛰어버리자 일명 ‘까치담배’로 불리는 개비담배가 길거리 가판대에 재등장했고 언론은 ‘70년대로 회귀하는 것인가’라는 시민들의 불만 어린 반응을 앞 다투어 실었다. 그동안 다른 OECD국가들에 비해 담뱃값이 쌌던 것은 사실이지만, 갑자기 두 배 가까이 올라버린 가격에 노인이나 일용직 노동자처럼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흡연자들은, 당시 정부가 개비담배 판매를 불법으로 단속해도, 한 개비에 300원 하는 이 낱개 구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말아 피우는 연초담배와 담배를 끊기 위한 시도로 전자담배가 확산되기도 했다.
 
사실 개비담배는 2015년 담배 가격 인상 이전에 이미 부활해 있었다. 2012년 12월 8일부터 일정 면적 이상의 술집과 식당에서 흡연이 금지되자 2013년 종로 곳곳의 가판대에 개비담배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때만 해도 금연을 시도하는 흡연자들이 담배를 덜 피우기 위해 개비담배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5년 면적에 관계없이 모든 음식점·술집·커피숍 등에서 금연이 실시됨과 동시에 담뱃값마저 크게 오르자 개비담배의 부활이 다시 회자되었는데, 이번에는 가격 부담이 개비담배의 구매를 더 독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뱃값 2000원 인상을 이틀 앞둔 2014년 12월말 서울 시내 한 가판대에서 시민이 한 개피에 300원 하는 '까치담배'를 사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70~80년대(그리고 그 이전) 서민들의 ‘까치담배’가 몇십 년 후 다시 등장한 것처럼, 2000년대의 풍속도에는 ‘까치담배’의 짝이라 할 만한 ‘잔술’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예전에 ‘잔’으로 파는 술의 주인공은 소주, 즉 ‘잔소주’가 주를 이루었다. 70년대에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포장마차에서 선 채로 한 잔 걸치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지금도 포장마차나 선술집에서 종이컵·유리컵에 소주 반병을 담아 잔술로 마시는 이들이 있다. 탑골공원 포장마차의 어르신들이 그러하고, 절약을 위해 선술집에서 잔술을 선호하는 취업준비생들이 그러하다.
 
한편, 예전처럼 무조건 취하는 문화가 아니라 적당히 가볍게 마시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도 잔술문화의 부활을 독려한다. 굳이 많이 마실 필요가 없어 잔술로 기분을 내는 직장인, 혼술족이 있고, 소주·막걸리보다 훨씬 비싼 위스키·와인이 잔술 대열에 합류하기도 하며, 마트에도 잔술 개념의 적은 용량을 담은 주종이 등장한 것은 예전과 다른 변화라 하겠다. 그런데, 자신의 형편이 넉넉해도 담배 한 개비 얻어피우고 술 한 잔 얻어먹는 걸 습관처럼 반복하는 유형의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아니다. 
 
집에는 쌀독에 쌀 있고
처마 밑에 연탄 쟁여놓았으나
집을 나서자
천생 거지였다

담배는 늘 얻어피웠다
전쟁이 지나간
사나운 인심
차츰 야박해지는 인심이나
담배 인심은 남아 있어

여기저기 술집 기웃거리다가
한데 어울릴 판이 있으면
거기 과감히 자리잡아

술 마시다가
술보다 술안주만 축낸다
술자리 말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그래?
그래?
그렇소!
따위 박자 맞춰가며
젓가락은 부지런히 안주를 집어올린다
어느새 술은 남고
술안주는 없다
여기 안주 한 사라 더!

< … >
(‘조호철’, 11권)
 
포장마차 선술집
 
잔술을 논하는데 포장마차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참새구이와 소주로 상징되던 50~60년대의 포장마차에도, 닭똥집·꼼장어·어묵 등 안주가 다양하게 확장된 70년대의 포장마차에도 잔소주가 동반자였다. 80년대에도 서민과 함께 해 온 포장마차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일제단속의 대상이 되어 철거된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노점상이 되어 포장마차에 도전하면서 포장마차가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포장마차는 손수레의 네 기둥 위만 살짝 광목천으로 덮었던 소박한 모습에서 바람막이 비닐 천막으로 전체를 가린 포장마차, 실내 포장마차, 기업형 포장마차에 이르기까지 형태도 규모도 다양해졌지만, 매 시기 서민들이 지친 심신을 쉬어가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서로 격려와 위안을 나누는 공간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상태에서 손수레도 광목천도 없고 비를 가릴 지붕도 아무런 천막도 없이, 원통형의 휘발유 드럼을 둘러싸고 서서, 비를 맞으며 막걸리 사발을 드는 다음의 풍경 속에도 겉은 초라하지만 포장마차 선술집의 애잔한 위로가 담겨 있다.
 
서울 한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있는 시민들. 사진/뉴시스
 
그 술집은 문이 없다
그 술집은 벽이 없다
그 술집은 지붕이 없다
그 술집은 목로도 앉을 데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은
빈터에
서 있는 미군 휘발유 드럼통 몇개

그 빈 드럼통 둘러서서
막걸리를 마셨다

술꾼도
사기그릇 술잔도 비를 맞았다
술항아리도
술집 아낙도 비를 맞았다

가을 저녁비
절망은 달기만 했다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누군가가 노래했다
여기
저기서
따라 불렀다
1952년 폐허 명동의 청춘!

길 건너는 이북이고
길 이쪽은 이남이었다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릿길

비를 맞았다
단벌 잠바
염색 잠바 젖어들었다
살아남은 자들
숱한 죽음 지나
여기까지
터벅터벅 걸어온 자들
비를 맞았다

< … >
(‘도라무깡 술집’, 20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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